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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2.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14.

13. 영원

아버지는 14년 전에 돌아가셨다. 요양병원에 몇 개월 계셨는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고향마을에 한 번 데려다 달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그런 쓸데없는 말 하지 마시라며 짐짓 마음 약해진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하셨다. 그러다 병세가 급작하게 악화되어 아버지는 고향 마을을 가보지 못하시고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는 크게 후회하셨고, 나는 그게 무슨 차이냐, 어차피 죽음은 다 끝이고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보면 뭐하고 안 간다고 죽음 앞에 뭔 차이가 있느냐며 애써 어머니를 위로해 드렸다. 하지만, 사실 그건 그냥 위로 차원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내게는. 천국에 부활도 없고, 극락에 윤회도 없다. 모든 게 산 사람들이 지어낸 자기 위로 차원의 개념이다. 종교는 다름 아닌 고도의 도덕 체계이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이 만든 인위적 사고 체계일 뿐이다. 그것이 권력이 되어 사람들을 옭아매면서 마치 실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냥 허구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개념의 문제가 아니고, 실전의 문제다. 그래서 그것은 현실을 대하는 주체의 문제다. 초월적 세계를 거부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내 경우, 제사 때 잘 먹으려고 지금 굶을 수는 없다. 초월 세계를 위해 지금 여기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더군다나 그나마 제사는 배불리 먹는 현실이라도 존재하는 분명한 실체지만, 천국은 완전히 만들어진 허상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절대 긍정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절대적 현실 긍정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영원이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기독교의 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이나 초월 존재가 아닌 현재의 현실을 중심으로 삼아 미래의 시간이 회귀하여 영원이 되어 자리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 영원이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재의 힘과 의지의 총체인 것이다. 힘과 의지로 현실을 둘러싸는 온갖 난관을 극복해야 미래를 현재로 당겨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회귀다.      


이쯤 되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시간을 차원으로 생각해 볼 때 붓다의 연기론과 비슷하다. 만물은 끝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면서 장구한 세월 속에서 되풀이하여 순환한다. 그러니 붓다와 마찬가지로 니체의 영원도 단순한 운명론이 아니다. 영원한 순환이라는 우주적 시간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실존의 문제다. 결국 이는 시간의 문제인데, 니체의 시간은 처음과 끝이 있는 직선의 시간도 아니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 하나로 시작하고 귀결되는 단일성의 문제가 아니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실체들이 순환되는 복합과 중층의 문제가 된다. 그것을 ‘지금 여기’의 문제로 치환해보면, 결국 시간과 실체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된다. 이를 사회적으로 말해보자. 현재의 실체는 이성이라는 단일 주체가 분명하게 규정하는 어떤 질서를 목표로 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중심과 변두리가 없는 원 안에서 모든 개체가 주체가 되어 감성과 정신으로 다양하게 해석하도록 구성되는 것이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젊다고 해서 젊은 것이 아니고, 늙다고 해서 늙은 것이 아니다. 젊다는 혹은 늙다는 것을 생물학적 관점 말고 여러 층위와 차원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무엇이 젊고 늙은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고 삶이 아니고 죽어 있다고 죽음이 아니라는 말, 삶과 죽음은 결국 서로 간의 하나의 일부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러한 관점과 해석 중심의 세계관으로 현실을 밀고 나가는 것이 니체가 추구하는 영원회귀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과 관계하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항상 뭔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매진한다. 그런데 그 욕망을 성취하고 나면 누구에게나 권태가 오기 시작한다. 욕망이 이루어져 일상이 되면서 삶은 루틴에 빠지고 일상은 지루해진다. 그러면서 삶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고 회의하거나 느닷없이 태생적으로 죄인이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또 다른 욕망에 생기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좌절한다. 고통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고통을 피해야 한다고 두려워할수록 고통에 빠지는 것이다. 니체는 다가오는 고통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고통은 또한 지혜를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달리 보면 행복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통은 영원히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달리 무슨 방법을 계발하려 하지 말고 그냥 고통 그 자체로 받아들일 것을 바란다. 현대인에게 감기와 같이 따라 다닌다는 우울증에 대한 처방은 바로 이런 니체의 고통에 대한 관점과 동일하다. 밀려오는 우울을 인정하는 것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고통은 영원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끊이지 않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봤다. 결국 욕망과 성취의 반복에서 나온 것이고, 영원한 삶의 사이클에 대한 긍정의 문제다. 그것이 동일한 반복의 영원회귀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동일하게 보이는 것은 더 이상 동일한 것이 아니다. 차원이 다른 여러 요소들이 작용하면서 특히 필연만이 아니고 우연까지 작동하면서 어떤 차이가 발생한다. 그 차이는 영원한 순환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 영원회귀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 곧 지금과 다른 또 다른 실존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도는 서로 다름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은 실존으로 영원회귀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현실이라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강인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 고통과 시련에 익숙해지거나 종속되지 말고 말이다.     


"어느 날 낮 또는 밤에 한 악마가 가장 깊은 고독에 잠겨 있는 그대 뒤로 살며시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너는 네가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 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되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념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온갖 일들이 다시 되풀이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것들이 모조리 똑같은 순서와 맥락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이 거미도, 나무 사이의 달빛도,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뒤집어져 되풀이 되고, 그와 함께 미세한 티끌에 불과한 너 역시 같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대는 땅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서, 그렇게 말한 그 악마를 저주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무시무시한 순간을 경험하고는 그 악마에게 ’너는 신이다. 지금까지 이보다 더 신성한 이야기를 나는 듣지 못했노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 그대를 지배한다면 그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변화시킬 것이며 아마 분쇄해버릴 것이다. 모든 일 하나하나에 행해지는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없이 계속 되풀이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과연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확증 말고는 너 이상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려면, 그대는 얼마만큼 그대 자신과 인생을 사랑해야 할 것인가?"

 《즐거운 지식》 341.


섞여 있으면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무한대와 무(無)가 함께 있는 것

카오스인가 코스모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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