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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1.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13.

12. 자유

일의 노예로, 사회가 정한 어떤 가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도덕 혹은 이념 안에서 지치게 살아가는 일상. 거기에서 벗어나는, 그래서 바닷가 파도가 넘실거리거나 대나무 숲 위로 햇살이 한 줄기 들어오는 일상의 바깥으로 떠나는 것이 자유인가? 혹 아니라면, 우리에게 자유는 무엇인가? 니체는 '개인적 자유의 보호'라는 거창한 명목을 달고 있는 소극적 자유가 지향하는 것은 저급한 욕망 추구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것이 저급한 이유는 각 개인의 능력과 힘에 대한 의지는 사라지고, 정해진 시대적 틀에 따라 즐기는 차원의 삶을 누리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소극적 자유에서는 겉으로는 누구나 구속이나 강제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자유로운 활동은 표면적인 것일 뿐, 실제로는 주체적 의식이 상실된 상태고 결국 그것은 제도에 대한 복종일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 같이 어떤 보편적 본질로서 상정된 자유 개념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산 계급 프롤레타리아가 세운 정치·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해준다는 차원에서 전형적인 천국을 상정한 기독교적 세계관과 동일하다. 사회주의 체제나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인간은 균질하게 평균적으로 획일화된다. 이를 니체는 일종의 기계적인 노예로 본다. 니체는 기독교의 '최후의 심판'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주의 혁명'은 주체가 사라진 위에서 설정된 복수라는 달콤한 위안에 불과하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정치적인 평등을 절대선(善)의 가치로 평가하는 민주제도 마찬가지 차원에서 비판했다. 민주제는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이상으로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 또한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묶이고 그 안에서 니체 특유의 개체성이 약화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개체성이 극대화 되면서 최대한의 힘과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해버린다. 개체 간의 차이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도 인정하지 않는 무리수를 둔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민주제가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모두가 비범성을 제어하고 평균치에 수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제는 인간을 무력하게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한다. 그러니 전적으로 위선일 뿐이다. 개인의 차이를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사회의 약자에게 평등이라는 이상을 주입한 것은 결국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을 획일화 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심지어는 민주제까지 겨냥한 니체의 이러한 극단적인 반(反)평등주의적 원리는 일단은 그가 내세우는 위버맨쉬에 – 대부분 ‘초인’으로 번역하지만, ‘초인’이 갖는 수퍼맨, 초월자 등의 의미와 너무나 달라서 원어로 그냥 쓰는 게 낫다, 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라 ‘위버맨쉬’라 쓰기로 한다. 위버맨쉬는 도덕, 전통, 종교 등을 깨고 나와 인간 정신의 한계를 극복한 인물이다. - 해당하는 문제라서 우리 같은 범인이 현실적으로 그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일단은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경우든 철학적 인식이란 어떤 진리를 향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그것을 얼마만큼 실천할 수 있느냐의 문제여야 한다면, 그 위버맨쉬의 존재와 가치는 개체적이고 상대적으로 정할 수 있다.      


니체의 ‘자유’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적으로 서지 못하면 자신이 속한 가족이든 공동체든 국가든 민족이든 그 집단은 자신의 희생으로 득을 보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데도 그는 여전히 정신 승리에 취해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그 집단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을 강제하고 착취하는 걸 알면서도 그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희생당한 사람은 언제까지나 자신이 희생물임을 알지 못한다. 본인 스스로가 희생을 충동질하는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살 뿐이다. 그 자체를 깨부술 의지도 힘도 없이 그저 사육되면서 살 뿐이다. 잠시 휴식하면서, 그것이 힐링이라고 자족하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겉으로는 더 잘살기 위해서라지만,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를 모르니 그냥 하는 텅 빈 소리일 뿐이다.      


실천적 차원을 고려해 볼 때 니체에 의하면 이것은 ‘소수’에 관한 문제로 특이성과 관계하는 것이다. 소수성이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와의 거리로 정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 즉 남성, 정규직, 전통/도덕, 자본주의 능력 등에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멀리 떨어졌느냐에 따라 소수성은 정해진다. 그 사회 가치로부터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소수성이다. 그렇다면 소수성은 결국 저항과 고독의 삶이다. 대중성, 일반성, 규율과 질서, 자기 포기와 공동체 수호 등의 가치를 지키고 그 위에서 관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와 정치의 원리다. 거기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시키면 시킨 대로 바로 실행하는 추종자를 키우는 것이 인간 경영의 진리다. 이런 길에 저항하라고 소리를 지른 이가 니체다. 결국 니체가 가야 한다고 설파한 길, 그 자유정신의 길은 개체가 독립적이고 스스로에게 강하게 명령하는 자가 택한 길이다. 붓다의 가르침, “뭇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것이 바로 그 니체의 자유정신이라고 하면 크게 잘못 이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니체가 말하는 자유정신을 따르면서 살아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우선, 그 자유는 평범하고 대중적이고 다수적인 것, 모든 사람이 떠 받들어 대는 것들, 명예, 돈, 관직, 관능 등을 추구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그 대중의 이치를 거부하면서 홀로 서는 인간, 고독 하는 인간, 묵묵히 걸어가는 길을 택해야 한다. 자신을 실험하는 사람이고, 시도하는 사람이다. 그로써 미래를 스스로 열어가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어딘가에 매여 자신을 희생하고 있지 않은지 살피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 누군가라고 하는 것으로는 가족일 수도 있고, 공동체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특정 학문일 수도 있고, 사랑과 희생의 종교 일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 스스로를 잃고 그 위에서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하는가? 만약 그렇다, 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것부터 중지해야 한다.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자유의 삶이다.      


정신도 한 때 너는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에서도 미혹(迷惑)과 자의(姿意)를 찾아내야 한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해 내려면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분출하는 것인가?

침잠하는 것인가?

당신은 자유를 어디에서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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