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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1.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12

11. 경외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미덕은 무엇일까? 너무나 범주가 넓은 질문이지만, 먹고 사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이 시대는 노동의 시대고 근면의 시대다. 시간이 남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 효율의 미덕이고, 마지막 단 1분 1초라도 마른 걸레 짜듯 모든 에너지를 짜내는 근면이 미덕인 시대다. 니체는 근면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현대 문화를 ‘종교적 본능’을 해체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니체는 종교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가 비판한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이지, 인간 저변에 깔린 종교적 본능은 아니다. 이성과 도덕을 비판하고, 본능을 높이 친 철학자답게 그는 종교에 관한 인간 본능을 높게 평가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종교적 본능은 경외심이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그 경외심을 현대인들은 가치 있게 보지 않는다. 단지, 그 알맹이가 없이 종교라는 틀 안에서 의례라는 껍데기로 포장해놓은 희생과 자비 그리고 사랑과 연민이라는 탈(脫)인간의 도덕에 열광할 뿐이다. 그 열광 또한 공장에서 생산물 찍어내듯이, 대형 마트에서 그 생산물을 소비하듯 처리하는 열광이다. 이른바 인간 본능으로서의 종교심은 없고, 그 자리에서 죄와 구권을 둘러싼 이상(理想)의 틀로서 종교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의례나 관습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 그렇다. 결국, 노동하고 근면한 인간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인간이 된다.      


삶이 바쁘고, 무겁다 보니 눈앞에 펼쳐진 우주적 차원의 이치와 그에 대한 외경심을 가질 수 없다. 밤 새 내리는 비가 그치고 아침 햇살이 지붕 위로 얼마나 깊숙이 내려와 비춰지는지, 그 사이사이에 영롱하게 비춰진 물방울 사이에 비추인 공기의 모습은 어떠한지,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이 모든 세계를 주관하는 이치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지, 그 너머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자연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는 현대인이 얼마나 있을까? 외경심과 관련하여 그가 단지 하는 일이라고는 경전을 펴고 만들어진 규율과 진리를 머리로 새기고 외워 훈령으로 소지하는 것뿐이다. 외경이라는 본질은 간 데 없고, 외식(外飾)만 남으니, 저급한 제도가 될 뿐이다. 그들은 고귀함이 뭔지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나아가 지금 처한 문제를 극복하게 하는 어떤 원천,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품고자 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제도로서의 종교를 통해 물질과 권력의 관계를 확장시키고 키우고자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인민이 교양인보다 훨씬 낫다고 말한다. 교양인은 소위 교양이라고 하는 경외심 없는 외식의 훈령 같은 것으로 무장되다 보니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그 제도화 된 종교로 사람과 자연을 이격시키고 사람 안에서 사람을 또 이격시킬 줄만 알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경이로운 관계를 헤아릴 줄 모른다. 외양간에 묶여 있는 소든 마당에서 뛰어다니는 개든, 말 못하는 짐승에 다가서지 못한다. 매일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자연에 대해 마음을 나누는 게 없다. 자신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오로지 전시 혹은 소유 차원으로만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밖에 있는 것들, 그것들을 만져보고 핥아보고 쓰다듬고 조사하고 알아보니, 지식은 갖추겠지만, 지혜가 없다. 그것이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회에서 대접을 받게 하는 원천으로 작동된다. 그렇지만 그런 차별의 기준으로 기능하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고귀한 것에 경외심을 품고 스스로 삼가는 민중의 마음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둘 가운데 후자를 가진 사람을 니체는 자기 내면의 무서운 충동들, 자기 심연의 무서운 괴물들을 본 적이 있거나 그것을 예감하는 인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이야말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라고 했다. 그 신은 바로 아주 단순한 경외심이다. 반면에 현대의 교양인은 잡다함을 섬긴다. 잡다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 교양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인을 잡식 인간이라 불렀다. 그 잡식 인간은 기능과 효율의 인간일 뿐 실존하는 인간은 아니다.      


몇 년 전,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광고가 있었다.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게으르고 싶다, 격렬하게, 게으르고 싶다, 뭐 이런 비슷한 광고도 있었다. 현대인들이 너무나 일을 많이 하고, 그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그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교묘하게 소비로 연결시켜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아주 간교한 광고다. 그 격렬 정도로 열심을 다 해 일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산업화를 거쳐 나오면서 누구나 칭송하고 찬양한 우리 시대의 미덕이었다. 개인의 생존과 국가의 경쟁력을 동시에 가져오는 최고의 삶의 태도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저 광고에 나오듯,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 되는 시대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과 최선의 미덕이라는 신화로부터 빠져나오려 하는 중이다. 치열한 경쟁을 거치다 보니 과거에 비해 잘 사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최소한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대접을 받는 장치도 국가가 마련해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물질적 풍요는 누리고 산다. 물론, 상대적 박탈감이야 말 할 필요 없이 존재하지만. 그런데 사람들은 더 불행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 라고 반문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사회가 만드는 미덕에 여전히 자신을 버리고 돈과 일의 노예로 사는 것에 대핸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 잠시 떠나는 것 말고 말이다. 당신은 그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는가?     


사회는 혹여나 그 노력과 이성과 목표와 성공의 신화가 깨질까봐 전전긍긍 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기 위해 신화를 작동시킨다. 그 신화에는 가족도 등장하고 공동체도 등장하고 국가와 민족도 등장한다. 그런데 그 어디를 샅샅이 뒤져 봐도 개체 인간은 없다. 그 신화 안에서 개인은 전체를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이니, 부품이 된 개인은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지키는 일을 할 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무도 그 치명적인 위험에 대해 입을 대지 않고, 신화를 향해 나발만 불어댈 뿐이다. 혹시 누군가가 목소리를 낸다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에서 다만 '열심히 일한'에 방점을 찍을 뿐이다. 힘은 자신을 벼리는데 써야지, 자신을 버리는 데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 외의 다른 목표를 향해 쓰면 사람은 죽고 그 목표만 사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쓰는 것 그것이 타자와 자연에 대한 이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공감이다. 그것을 나는 니체가 말하는 경외로 이해한다.       


"얼음이 가까이에 있고, 고독은 엄청나다 ㅡ 그런데도 모든 것이 어찌나 유유자적하게 태양빛 아래 있는지! 어찌나 자유롭게 사람들은 숨 쉬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사람들은 자기 발아래 두고 있다고 느끼는지! ㅡ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얼음과 높은 산에서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ㅡ 삶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모든 것을, 이제껏 도덕에 의해 추방당해왔던 모든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서문> 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하니

그것을 바라고 그 이치를 좇아가는가?

그 황금의 땅, 수와르나 부미svarna bhumi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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