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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1.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11

10. 현실

잔에 물이 절반 찼다고 가정해보자.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절반‘이나’ 찼다고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비관주의자, 절반이나 찼다고 하는 사람은 낙관주의자라고 말 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와 반대다. 전자는 나머지 반을 더 채우려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후자는 반이 차 있음을 만족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전자는 사회에 비판을 많이 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범사에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 굳이 비슷한 입장으로 나눠 말해보자면 전자는 사회운동가들의 입장에 가깝고 후자는 기독교나 불교 신자들의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차이는 현실을 어떤 관점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인데, 그것은 다시 미래와 연관 지어진다. 전자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미래를 스스로 당겨 오리라 믿는 것이고, 후자는 현실에 감사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미래는 어느 날 도둑처럼 온다고 믿는 것이다. 니체는 전자의 입장이고 나도 전자의 입장이다.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삶을 살아가는 문제의 시작은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으로 인류의 삶이 비관적으로 흘러가더냐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진보하는 쪽으로 흘러가더냐의 판단과 연결되니, 결국 역사 판단의 문제가 된다. 니체는 비관주의 입장이다. 그런데 니체의 비관주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관주의와는 결이 다르다. 그는 결국 우리가 최악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비관은 용기다. 현실의 최악 상태 즉 현존재의 심연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 때 중요한 것은 거기에 어떠한 환영(幻影)도 없이, 바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접근, 지금까지 전통으로 쌓인 그 선입견을 떨쳐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즉 니체가 말하는 의미의 비관주의로 무장하면 우리의 삶은 비관적으로 나락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극복하면서 주체적 삶이 강화된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낙관주의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한다. 감사, 희생, 은혜, 자비, 공동체, 조직 등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환영에 눈꺼풀이 씐 것이다. 그 환영이 이념이든 이데올로기든 종교든 소망이든 간에 관계없이 그것들은 현실을 틀에 가두어서 보게만 한다. 그 안에 냉철이라는 것은 없다.      


이 두 가지 상반된 관점 가운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환영에 둘러싸인 낙관주의가 훨씬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현실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고, 환영으로 만들어진 현실이다. 그 환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오독으로 인한 확신을 가져다주면서 만족하고 안주하게 만든다. 새로운 조건이나 환경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저주인 것이다. 그 환영이 바로 ‘진리’라는 이름으로 칼날을 무디게 하고 부드럽게 하여 현실을 은폐하는 결과로 이끈다. 그에 대해 반발하고 저항하면, 온갖 회유와 강압이 주변 안팎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 때로는 도덕으로, 때로는 종교로, 때로는 전통의 이름으로 윽박지른다. 요즘 특히 사회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념이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노동이든 민족이든 여성이든 그 해방의 이름으로 짜인 틀, 그것은 인간 개체를 그 틀 안에서 사육되고 순응하게 만든다.      


니체는 이를 현대성의 문제로 결부시키면서, 팽팽한 활을 꺾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니체는 활시위란 팽팽해진 상태로 있는 힘을 한껏 동원해 최대한 멀리 당겨야 해야 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야 최대한 멀리 화살을 쏴 보낼 수 있는데, 현대인들은 그런 이치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 이유는 유럽의 경우 기독교가 그 긴장을 사랑과 연민으로 이완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사회는 독특함이 없는 대중이라는 것으로, 개체 없는 하나의 무리가 만들어졌고, 그것의 성격은 평범하고, 획일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았다. 비단 기독교나 다른 종교 혹은 도덕이나 전통을 따르는 보수주의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고, 민족주의자들이나 급진적 페미니즘을 따르는 사람들도 전혀 다르지 않다. 그들은 현실에 없는 어떤 이상(理想)을 그려 놓고, 이성을 토대로 하는 낙관으로 그를 이루려는 삶을 산다. 그런데 그러한 삶은 이루어질 수 없는 단지 목표일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삶을 사는 이유는, 그들이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도덕이나 전통을 업고 사는 보수주의자들과 이상을 향해 매진해가는 진보주의자들이 동일한 현실에 대한 태도를 갖는 경우가 많다. 현실이란 혹독함이 두 경우 모두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틀과 목표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향한 삶. 자기 존재의 포기 혹은 자기 희생. 결국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불신에서 나온 것이다. 니체는 이를 두고 자기 파멸의 태도라 했다.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 승리하는 자는 기존의 도덕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자다. 한 쪽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외에도 범죄자, 파렴치한, 사회 부적응자. 열등한 자 등으로 비난받은 경우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두 개의 큰 범주 가운데 후자의 경우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 크다. 그래서 크게는 니체의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 낙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거대한 획일성의 대중 덩어리 속으로 들어가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다수다.  결국 망치를 들고 기존의 서양 철학을 다 깨고 다닌 니체의 세계관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은 이론이나 말과는 달리 실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철학의 문제가 아니고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인다면, 그 자유와 낙인찍힘의 관계를 어디까지 받아들이는 정도로 설정할 것인가, 가 결정적으로 막히는 지점이 된다. 그것은 각자의 힘에 따라 달라진다. 힘을 기르는 자는 다가오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처해나갈 수 있지만, 힘이 없는 사람은 그 틀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플라톤에 대한 투쟁, 또는 대중을 위해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되어온 그리스도교 교회의 억압에 맞서 한 투쟁은 –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이기 때문이다. - 유럽 내에서 아직까지 없었던 화려한 정신적 긴장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이렇게 팽팽한 활을 가지고 이제부터 가장 먼 표적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선악의 저편》 서문     

척박한 땅,

꿈이라도 꿔야 살 수 있는 것 아니냐지만

사실, 그건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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