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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Dec 31.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10

9. 소통

글을 쓸 때 사람들은 이해되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다. 나 같은 경우, 내 글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글쓴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독자 스스로 해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인 경우, 대개 철학적이거나 예술과 관련된 글에서 주로 그렇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경우는 대중 교양도서용이겠지만, 그 글을 통해 독자 스스로 생각의 여지를 넓히기를 바라는 경우는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은 이해와 느낌을 갖도록 하려 하지 않는다. 매우 난해한 글을 써서 독자로 하여금 그 세계의 밑바닥까지 들어가 홀로 고독하게 해석을 해보게 하려 하는 것이다. 소설가 박상륭이 쓴 《죽음의 한 연구》가 좋은 예다. 산문을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운문이나 그 비슷한 아포리즘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니체가 바로 그 좋은 예다. 사진의 예를 들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분명한 팩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경우는 그 사진의 제목을 확실하게 달아준다. ‘촛불의 밤’이라거나 ‘범어사 가는 길’ 혹은 ‘히말라야 사람들’ 이라거나 하는 따위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그 이미지를 가지고 누구나 알 수 있는 1차적 의미나 느낌이 아닌 좀 더 깊이 있는 저자의 느낌이나 의미를 전달하고 소통하고 싶은 경우에는 같은 사진이라도 제목이 달라진다. ‘어디로 가는가?’라거나 ‘끝이 아닌 시작’이라든가 ‘인간은 악이다’라는 식으로 제목을 단다. 

    

말을 한다는 것, 글이든 이미지든 몸짓이든 그 무엇으로든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주체자의 생각을 전하는 것인데, 니체는 많은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는 것을 탈피해야 한다고 했다. 그 특유의 개체를 중시하면서 평균이나 획일을 벗어나야 한다는 세계관에 의거해 그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해석의 여지를 넓히려는 시도다. 가히 니체답다,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니체에게 글쓰기의 형식은 자신의 세계관과 외형적인 관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는 글을 쓰면서 독자를 선별하려고 자신만의 글의 형식을 고안해냈다. 내용도 맥락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니 형식도 그렇게 맥락적 해석에 맞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사유를 극화(劇化)하면서 의인화의 단계까지 확장했다. 그러니 우리 독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경우 한 편의 연극을 보듯 서사까지 함께 읽는다. 그에 따라 그 안에는 자신만의 스타일, 은유, 상징, 기호, 템포, 뉘앙스 등이 춤을 추듯 흐른다. 그래서 그의 글은 자신의 사고 체계와 마찬가지로 물 흐르듯, 유연하고 유동적이다. 내용이 상황에 따른 변화, 물 흐르듯 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하려는 것이니, 글도 상선약수 그대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만 전통이나 도덕으로 굳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전하고 소통하는 외부 수단인 언어도 시간이 가면서 굳는다. 언어 자체가 하나의 문법이 되고 그 문법은 관습이 되면서 권력이 된다. 한국 사회에만 있는 표준어라는 게 그 좋은 예다. 표준어를 쓰지 않으면 졸지에 교양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유럽 사회에서도 《바이블》을 담는 라틴어가 그랬고 고대 인도에서도 힌두교 성서를 담은 산스끄리뜨어가 그랬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여러 속어로 《바이블》이 번역되기 시작했고, 인도의 경우 붓다가 산스끄리뜨(Sanskrit)어로 가르치지 않고 대중들이 널리 쓰는 빨리(Pali)어로 가르쳤다. 우리의  경우 최만리를 비롯한 성리학 사대부들이 기를 쓰고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언어는 관습이 되면 인간의 사고를 제한하고 강제하는 폭력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언어는 현실을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가상으로 획일화 된 상을 만들어낸다. 그 안에서 각 개체는 각각의 고유 체험과 인식으로부터 분리 당하게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여러 이질적이고 다양한 생각들을 소통하게 하려면 언어를 문법이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열어줘야 한다. 규정하지 말고, 정의를 내려 제한하지 말고, 느낌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도록 해야 변화를 추동할 수 있고, 그것이 인간의 본능과 더 잘 맞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원하는 소통의 방식이다. 결국 니체는 아포리즘으로 말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끌고 가려는 생각을 버렸다. 고독한 철학자의 길이다.     


니체는 철학이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이상주의적 담론으로 흐르는 것을 심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만든 허구의 세계라는 주장이다. 오랜 시간 전통으로 굳고, 거기에 성인의 말씀이라는 옷을 입혀 사람들을 옥죄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다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그 토대의 토대까지 깊이 내려가 하나 씩 하나 씩 다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소통하는 철학이고 그 소통은 자연의 이치대로, 인간의 본능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마치 중국에서 작위(作爲)를 배격하고 무위(無爲)를 중시하는 노자와 궤를 같이 하는 측면도 있다.     


니체의 소통은 그 자신과의 소통이다. 그래서 그는 독자를 위해 책을 쓰지 않았고, 그 결과 그는 당시 독자로부터 처절히 외면을 받았다. 스스로 자기 속으로 들어가 은둔해버리는 것이 그의 철학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는 완성되지 못한 글을 많이 남겼으니, 그 가운데는 혼잣말로 하는 수준의 글들이 많다. 니체 전문가들에 의하면 특히 출간 되지 않은 유고(遺稿)의 경우 자신의 체계와도 맞지 않고 일관성도 없는 혼자만의 메모 수준인 것도 많다고 한다. 그러는 도중에 마지막 10년을 혼자 침상에 누워 있었고, 아무 생각도 남기지 않은 채 죽음의 세계로 갔다. 이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난, 니체가 중간 중간에 혹은 말년에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거나 유동적으로 가면서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곳으로 탈주해간 그  세계가 우리 모든 독자에게 자유롭게 열려 있다고 본다. 정답이 있을 수도 없고, 체계에 맞지 않아도 되는 그 세계로 우리 스스로 이주해 가면 될 일이다. 그 허용하는 범위는 내 스스로 정하면 될 일이다. 이것이 해석을 통한 니체가 보여준 소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으니 오류도 없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을 했던 사람이다. 독자도 니체의 밖에서 니체의 철학을 하면 될 일이다.     


"독일인 중에 내가 최초의 대가가 되는 아포리즘과 잠언은 ‘영원’의 형식들이다; 나의 야심은 다른 사람들이 책 한 권으로 말하는 것을 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을..."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51     


세상이 막히고 헝클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것을 누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소통이 우리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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