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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Dec 30.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9.

8. 해석 

이상(理想)은 서양 세계에서는 그 기원이 플라톤의 이데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데아 세계는 본질의 세계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존재 자체가 절대라서,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세계인가? 변하지 않고,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이 미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플라톤 식으로 말을 해보면, 이 세계는 완전히 어둡지도 않고, 충분히 밝지도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것이 완전히 어둡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니 그 자체로서 어둠의 본질일 것이고, 빛이 없으니 해석이 존재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역으로 완전히 밝다면 모두가 드러나 하나의 실체가 되는 즉, 하나의 실체만 볼 수 있으므로 그 어떠한 해석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해석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식한 후에 이루어지는 일로 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기 전에 이미 하나의 해석으로 그 사물을 받아들인다. 예컨대, 누군가로부터 말대꾸를 당했다면, 그것도 아침 일찍이 그 일을 겪었다면, 우리는 특히 나이 먹은 사람은 아주 기분 나쁜 일을 겪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일을 겪은 후 이미 그러한 상황에서 겪은 그러한 일은 기분 나쁜 것이다, 라고 누군가로부터 시작되어 습관이나 어떤 규정에 이해 해석된 것이 내 자신에게 들어와 나의 인식 체계를 점령해서 그렇게 인식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계 현상을 겪고 난 후 스스로 해석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이전에 해석되어 전승된 것을 겪고 그 전통에 따라 인식이 따라가는 것이 된다. 그러니 해석조차도 반드시 주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스스로 자기 관점을 가지고 해석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자기가 내는 목소리라고 하지만 그것이 자기 관점에서 나온 것인지, 신문이나 방송 혹은 전통에 의해 사육된 관점에서 나온 것인지는 의심해봐야 한다.     


이러한 관점과 해석의 문제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서는 일에서 아주 잘 볼 수 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선다는 것은 어떤 장면을 접하고 그것을 내가 원하는 어떤 서사를 위해 내가 해석하여 전유하는 일을 하러 나가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란 그 대상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 과정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인데, 결국 생각이라는 것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어떤 고유한 정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불가에서 중이 화두를 집어 들고 하는 것이 아닌, 어떤 존재가 우연히 나를 만나 나의 무념 혹은 거미줄 같이 얽혀 있는 생각의 혼란 속에 순간적 파문을 던져 그것이 새로운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나서는 것은 이 우연함과 충돌하는 지점이 만들어내는 불연속성의 파장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장은 많은 사람들이 겪으면서 규정해 놓은 인식을 벗어나 혹은 그 대상을 만들어낸 사람이 의도한 바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해석하는 일을 하도록 한다. 그것이 카메라는 대상을 지금까지 있어 온 본질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내 의도대로 해석하여 재현한 작업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로 세계를 보고 대상을 취하는 것은 텍스트가 아닌 해석을 하는 일이다.      


카메라를 들고 세계의 단면을 잡아 내 해석을 하든, 눈으로 바라보고 글로 옮기든 그 해석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다. 누구든 그 충돌할 때 발생하는 어떤 감정을 밖으로 재현할 때 자기만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타인의 그 스타일을 읽고 내 것으로 소화해서 해석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스타일 없이는 아무 것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스타일이 없이 재현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무중력의 상태일 텐데, 그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스타일이란 기호를 통해 그 충돌된 지점에서 발생한 나만의 내적 긴장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니체는 거북이걸음 걷는 곳에서 개구리 걸음이나 강물의 흐름으로 걷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좀체 못 알아 볼 것이라 했다. 독일인이 마키아벨리나 아리스토파네스를 잘 읽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 했다. 그것이 스타일이고 템포고 뉘앙스다. 그러니 스타일, 템포, 뉘앙스 등을 읽지 못하는 사람의 읽기는 일방적이고,  난폭하다. 그것은 다만 겉으로 드러난 의도만 읽을 뿐이다.     

 

그것에 의하면 진리는 단일하고 균질적이고 순수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현실의 세계에서 그런 단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라고 하는 것을 카메라로 재현하자면, 음영과 색조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순식간에 비(非)진리 혹은 그것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가상으로 가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니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진리와 가상을 서로 다른 양자택일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그것이 수시로 전환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예’와 ‘아니오’로, 옳고 그름으로 갈라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이치를 거부하면 물 흐르듯 변하는 그 여러 비(非) 진리 혹은 가상의 실체로부터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시간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나이를 먹으면, 시간의 지혜가 생긴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내용과 외형이 아닌 스타일이고 그 안에 미묘하게 담긴 뉘앙스다.      


해석과 관련하여 사회 변혁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진보는 실패했다. 그 이유를 딱 하나만 들라고 하면, 나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이 계급에 대해 본질론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이라 해서 그들이 선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이간질 하고, 고자질 하고, 비열하고, 비굴한 사람들이 부유하고, 군림하면서 사는 사람들만큼이나 차고도 넘친다. 단지 사회적 구조 때문이 아니고 자신이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남과 화합해서 살아가지 못해서 가난한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을 굳이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에게 빼앗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한 역사의 주체로 삼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핍박받았다는 그 계급성 하나 때문에 그들의 능력을 평가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권력을 주거나 그들을 무조건적인 평등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그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하지 않지만 그 불의의 현실에 저항하면서 핍박받고, 그 가운데 인간 주체성을 지키고, 현실을 헤쳐 나가는 힘을 지닌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인간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데 그들은 계급을 가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본질적인 것으로 봤다. 그러니 비(非)현실적이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선악의 저편》 108

본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이고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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