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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Dec 30.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8

7. 목적

죽음을 앞둔 노인들은 어떤 과거를 가장 후회할까?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 목적을 이룬 것에 대해, 그 목적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해, 그 과정에서 자기 주체를 버린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사람이라는 것이 죽음을 앞에 두었다 해서 평생 지녀온 완고함을 한 순간에 버리고 마음을 고칠 만큼 지혜를 갖고 있기는 하는 것일까? 오랫동안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도덕을 지키고 국가와 가문과 종교를 위해 희생하면서 살아온 관성에서 여전히 빠져 나가지 못해 그럴 것이다. 물고기가 살아본 세계는 물의 세계가 유일하다. 물고기는 뭍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의 이치로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역으로 그 경험해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담론인 종교와 도덕과 이상주의 이념의 완성이 삶의 목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가치를 위해 자신의 주체를 버리면서 살아간다. 죽음의 목전까지. 자기 주체 없이는 가더라도 타자가 세운 목적이 없으면 가지 못한다. 그렇게 한 평생 길들여져 왔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러 가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삶을 사는 것을 격하게 비판한다. 목적이란 단일하고,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예를 기독교에서 찾는다. 기독교는 분명하고 단일한 목표를 갖는 종교다. 그런데 그 안에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하는 신학이론이 나온다. 원칙 논리적으로는  성립 불가한 변형 논리다. 자유 의지란 목표 바깥의 세계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자유 의지는 그 목표 안에서만 성립한다는 게 모순이다. 기독교에서 말 하는 바 자유의지는 논리상 신의 ‘섭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니, 그것은 ‘자유’의 의지라 할 수 없다. 니체는 이 기독교의 자유의지를 ‘섭리’라는 틀 밖에까지 확장시키고, 인간 개체의 주체성을 담보한다. ‘영원회귀’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것은 나와 세계에 대한 무구한 믿음이지, 하나로 규정되고 그 주체에 의해 설정된 어떤 목표를 위해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도형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생성(生成)을 한 원(圓) 안에서 반복 순환하면서 보는 것이다. 그 원이라는 도형 안에서는 모든 점이 동일하게 중심이 된다는 의미가 중요하다. 특정한 지점에서 누가 먼저 깃발을 들고 나서거나 누가 끝으로 따라 붙는 먼저와 나중의 서열 차이가 없는 ‘사발통문’의 세계다. 그 안에서는 현재의 한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응축시켜 영원의 의미를 지닌다. 니체가 현실 파악을 그 무엇보다 더 가치 있게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바로 현재가 곧 영원이라는 것이다. 아니, 현재를 영원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결국 ‘영원회귀’는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다른 실존의 가능성,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어떤 타자성을 현실화하기 위한 시도로 가능성의 무한한 확장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원회귀를 허무주의 비슷하게 이해한다. 오독도 그런 오독이 없다. 전체 맥락을 읽고 이해하는 게 아니고 번역된 어휘가 주는 일차 기표만 읽기 때문이다. 주체를 버리고 해석을 하라 하는 것 대신 주체를 살리고 해석을 버린 것이다.      


니체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불만하지 않고 거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길러 그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주체를 키우라는 것이다. 단순히 자기 삶에 대한 비관과 남에 대한 그리고 상황에 대한 비판과 거부만으로는 그 힘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부정하고, 비관하고, 거부하는 것은 힘을 빼는 것이지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무모하게 부정하고 저항하니 《바이블》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가 되는 것이다. 부모가 하는 그 규정에 불만이 쌓여 집을 뛰쳐나가지만, 결국에는 ‘돌아온 탕아’로 집에 안주하게 된다. 부모는 성대한 파티로 그를 환영해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기를 명토 박는다. 그 돌아온 탕아와 같은 행위가 실패한 삶이다. 그렇다고 돌아오지 않는 탕아는 어떠할까? 자신을 버리는 것도 모자라, 조국통일, 민주주의, 독재 타도, 노동해방이라는 큰 뜻을 위해 인권이나 남녀 성 평등이나 동지에 대한 배려나 사랑은 무시하고 오로지 대의를 위해 자신과 주변을 모두 팽개치고 살아 온 삶에 대해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그런 대의가 실패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까? 그 대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할까?     


탈주를 하려면 유연해야 한다. 한 번 정한 목적이나 목표에 자기 스스로를 버리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면서 매진하는 것은 어리석다. 니체는 이 대목에서 사자와 같이 힘을 기르고 난 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유분방하게 가볍고 주변의 모든 것에 얽히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 정신의 발전 단계를 낙타-사자-어린아이의 3단계로 구분한다. 낙타는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명령에 복종하면서 어떤 어려움도 참고 버티는 정신을 상징한다. 사막을 달리던 낙타가 어느 순간 명령을 거부하고 주체적 자유를 선언한다. 이것이  사자의 정신이다. 그런데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단계로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이 무서운 일을 하기 위해 사자가 어린아이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말이 쉽지, 목적과 의지가 없이 그냥 어린 아이같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해야겠다고 굳은 마음을 먹고 사회의 질서와 전통을 거부하고 나가는 건 이 사회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길이다. 사회에서 평범하게 사는 우리 같은 범인이 섣불리 따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나는 니체가 말하는 해석의 삶을 원용해보기를 권한다. 니체를 유일 중심으로 두고 살지 말자는 것이다. 니체를 니체로 해석하되, 그 관점을 ‘나’에 둬 보자는 것이다. 그 안에서 목적, 자유, 극복을 나를 중심으로 하여 주체적으로 익히고 실천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니 그 경계나 깊이나 정도는 모두 다 다를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이 소화해 낼 수 있는 힘의 문제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태도와 관점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함을 갖도록, 가능하면 즐기고, 어떤 것에 매진하여 몸을 무겁게 하지 않도록, 누군가와 부닥치고 그로 인해 악연을 쌓았으면 가능한 대로 빨리 풀고, 잊어버리고, 새로운 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자연을 닮아 살아가자. 어린 아이 같기도 하고, 자연 같기도 하는 삶, 옳고 그른 것이 아니고 그저 그러는 삶. 그 안에는 능력의 차이, 우열의 구분,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관계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삶. 그 이치를 은유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내 안에서 능력껏 실천하는 것, 그것이 니체적으로 사는 것 아닐까? 원칙은 없고 융통성이 있는 삶. 자연이란 해석이고 여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왜 사냐고 물으니, 그냥 웃기에

한 번 더 묻는다.

왜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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