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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Dec 29.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7

6. 이상(理想)

벌써 10년 쯤 된 텔레비전 연속극 《뿌리 깊은 나무》, 참 재미있게 봤다. 그 이야기에 밀본(密本)이라는 한 베일에 싸인 가상의 인물이 주인공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그는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의 후계자로 인민을 위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성리학 이상주의자다. 왕에게 주어진 거대 권력을 거부하고, 인민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데, 그렇다고 주권재민의 민주제를 신봉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 권력인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세습되지 않고 능력이 되는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세우려 하는 정도전 일파의 주장이 오늘날의 민주제에 더 가까운 더 우월한 체제로 보이지만, 정작 문제가 그 다음에 발생한다. 우선, 세습되지 않고 유능한 재상이 나올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분명히 성립될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니체 식으로 더 아래로 한 발 더 아래로 들어가 살펴보면, 인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제는 왕권이나 재상권 민주제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한 발 더 들어가 보면, 지금 가장 진보적이라 하는 세력이 주장하는 노동자가 권력을 잡으면 그것이 더 우월할 수 있고, 적어도 노동자 인민이라도 더 잘 사는 체제가 될 수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더 다른 깊이에 있다. 왕권으로 가든, 재상권으로 가든, 민주 주권으로 가든, 노동자 주권으로 가든 그것들이 각각 내거는 것은 모두 이상일 뿐이고, 이상 밖 현실은 그것과는 다르다. 현실에서 분명한 것은, 권력은 부패한다, 는 것이다. 이상이란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신봉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현실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면서 적용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이든 신봉하면서 절대적인 것으로 받들어서는 안 된다. 신념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생기는 대로 폐기하고 또 폐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우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니체는 국가의 예를 들면서 우상이란 마치 그 누구로부터도 불편부당한 존재인 양, 그 스스로가 보편적 선이고 정의인 양 행세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쉬지 말고 싸워 그 우상을 깨부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니, 시대정신 또한 바뀌어야 하고, 그에 따른 행동 또한 끊임없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일정 수준의 완결이 이루어진 후 또 시간이 흐르면 그 처음의 완결은 다시 바뀌고, 그러면 그것은 첫 완결 때 갖추었던 그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완결 이전의 불완전 상태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회에서 항상 하나의 방향이 발현되면 반드시 그 반대 방향의 운동 즉 반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를 니체가 그리스 예술을 예를 들면서 말하듯 하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수시로 뒤섞이면서 예술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그 상태는 이성과 감성이 끊임없이 섞이고 때와 장소에 따라 그 비율이 또 달리 섞이는 것이 된다. 필연과 우연의 사이를 수시로 넘나드는 것이 된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 새로운 또 다른 현실을 끌고나가는 개인과 집단의 균형도 수시로 바뀌면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과정들이 쉬지 않고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 역사다. 그 갈등과 조정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그 주체인 인간 자체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수시로 변하면서 섞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 위에서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상을 좇는다. 왜 확고한 토대도 없는 이상을 그렇게 쉽게 믿고 따르는 것일까?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아 토대라는 게 없는 것이라, 자기 삶에 해만 끼치는 그에 대한 믿음은 왜 그렇게 확고한 것일까? 니체는 사람들이 그런 이상을 자신들의 생존 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언가 확고한 도덕, 무언가 확실한 진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할 것을 찾고, 또 그것을 지나치게 서두르며 섣불리 너무 깊숙이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상이란 이룰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 아무리,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 끌고 모든 인간이 다 협력하고 연대하여 밀어 붙인다 해도 그 이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이상이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 다음 단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던 상관없이, 사실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하고 또 해도, 이상주의자들은 지금 여기의 세계를 바꿀 수 없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지금 여기’라는 세계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세계의 이치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자꾸 그 기원을 더 높은 곳에서 찾는다.      

현실은 장애물 투성이다. 그 장애물이 있으면 최단거리는 곡선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럼에도 이상주의자는 직선으로 도달하려 할 뿐이다. 현실을 감안하지 않으니, 그 이상에 도달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상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그 이상을 향해 가는 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이상을 위해 자신을 더 많이 헌신하고, 희생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까지 집단적으로 몰고 가면 갈수록 그 이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죄책감과 양심의 고통이 따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오류의 심정이 생기면 사람들은 좌절하거나 그 길에 집착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이루려고 하는 더 큰 열정이 생기고 그에 따라 자기 억제와 현실 학대를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그러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 스스로는 거기가 나락인지를 모르는 채.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이상이라는 우상으로 인해 인간이 무기력해지는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현실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현실에 맞춰 사는 것을 열등한 짓이라고 본다. 도달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고 그래서 잴 수 없는 그 이상을 잴 수 있는 현실과 비교해서 더 우월한 것으로 평가한 그 오만함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존재하지 않는 오만함으로 사람들을 찍어 누른다. 허깨비로 현실을 탄압하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규정한 혼란스럽고, 감각적이면서, 물질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을 이상을 부인하는 삿된 것으로 치부 당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런 삿된 것의 총체다. 그러니 그 이상 속에서 현실은 가치 없는 것이고, 그를 따르는 대중은 모두 가련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을 실현시킬 도구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어떤 목적에 넘겨주고자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다. 사실 목적이라는 것은 없다."

《우상의 황혼》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

보이는 것이 혼돈이라면

세계는 혼돈이요, 일그러짐이다.

반듯한 것은 세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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