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수 Dec 28.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6

5.  무기력

어렸을 때부터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랐다. 아니 아이들을 키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내 스스로도 많이 하곤 한 말이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라든가, 침묵은 금이라는 말, 그 많은 동서양의 금언들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금언들을 관통하는 정신은 사람이란 어떤 평균에 수렴되면서 서로 같아지면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와도 일맥상통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과도 이어지기도 한다. 삶이란 상호성에 기반을 둬야 하며, 그 위에서 예측이 가능한 길을 따르는 자여야만 사회에서 인정하는 인재로 인정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이 모여 보편타당한 행동이라는 지침이 만들어지고, 그 지침에 따라 갈 때 사회의 응집력이 강해지고 그 기반 위에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 조국과 민족이 번영하고 그 안에서 개인과 가족이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그 담론을 다른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보편타당의 윤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아가 되고, 그 문제아는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통제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제어의 대상이 되어 온 그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 공동체와 사회는 그들에게 무슨 존재이겠는가?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는 원천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그 공동체 사회에 적응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기에 순응하거나 회피하는 길만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여 나름 판단력이 생긴 후에는 자신만의 길을 설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도전해보려 하지만 그 제어의 강제력이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목도하고 금세 좌절하게 된다. 그때 이미 자신은 너무 나약한 사람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무기력한 자, 그들은 과연 우리가 이 사회에서 바깥으로 처리해야 할 죄인들인가? 그들이 사회에 부적응 한 것은 소위 정상인들에게 죄를 저지른 것인가? 정상인들이 세워 놓은 질서를 어겼다는 것이 될 텐데, 그 질서라는 것이 과연 변하지 않는 진리의 힘을 가질 수 있는가?     


두려움이라는 건 하나의 사회적 충동이다. 이 맥락에서 니체는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두려움에서 생긴다고 봤다. 도덕이란 삶에서 위험을 제거하고, 그 위에서 사회란 그 도덕 안에서 함께 살 때 무한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했다. 도덕은 스스로를 낮출 것을 요구하고 개체를 철저하게 약화시키거나 없애버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개체란 둥근 원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어야 할 뿐, 원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튀어나와서는 절대 안 될 요소다. 이 말은 결국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개체는 무기력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래야 사회는 질서 안에서 안전하게 유지 되고, 그 안에서 다수가 편안해 진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경쟁이라는 것은 그 튈 수 있는 개체를 제거하는 게임이 된다. 경쟁이란 말하자면, 누가, 누가 더 무기력해질 수 있는가를 놓고 견주는 것이 되어버린다. 개체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길을 누가 더 잘 보여주고, 그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주는가를 시전 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니체는 무기력이라는 것이 발호하게 되는 것은 도덕이 자아내는 자비와 연민 때문이라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서의 사랑이나 불교에서의 자비 모두 동일하다. 사회를 벗어나 수도를 하는 승려들에게 물질을 기부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그 가르침 안에 필히 들어 있는 그 사랑과 자비의 공동체 정신으로 무장하는 것은 결국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러한 판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서 공동체 착취가 이루어지며, 그 착취를 사랑과 자비의 이름을 빌어 지속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한 것이 계속 되면서 그 수도승들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두 타인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그들이 만든 가치관은 세상을 무의미한 것, 버려야 할 것으로 만든다. 현실의 세계를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떠나 버린 그들의 사랑과 자비의 담론 안에서 사람들은 현실을 포기해야 할 곳으로 받아들인다. 기독교나 불교나 모두 초기를 지나 점차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그 대중화 된 기독교와 불교에서는 개인의 궁구보다는 대중의 사랑과 자비가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로서 종교는 사회를 규제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기력하게 좌절하였다.      


그것이 기독교든 불교든 힌두교든, 설사 종교가 아니고 그것이 이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든 민족주의든 간에 그것이 갖추고 있는 규율과 의무 그리고 이상이라는 도덕으로 무장이 되어 있고 그 안에 귀의했다면, 그는 그 조직의 도덕으로부터 무기력의 세례를 받고 그에 감읍하는 길을 간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는 그들로부터 미움과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 도덕과 규율 안에서 함께 원만하고 순종적으로 살면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과 비단과 황금으로 가득 찬 극락을 선사 받을 것이다. 그러니 그 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삶에서의 개체의 욕망을 제거하고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무기력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다.      


결국 종교나 도덕의 사랑과 자비란 부랑자 보호의 이치와 똑같다. 그가 정신 장애인이든, 신체 장애인이든 누구든 그 시설에 수용되면 그는 머지않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긍지를 상실하고, 결국 삶의 의욕을 잃게 되면서 무기력한 존재로 나락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삶의 의지가 꺾여 자신을 억누르고 자신을 그런 처지로 만들어 나락에 빠지게 한 어떤 궁극에 대해 저항을 못하게 하는 건 물론이고, 자신을 가두고 강제하며 억압하는 그 시설이 정한 어떤 규율이라는 도덕에 의해 철저히 사육될 수밖에 없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규율을 지키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죄책감과 자신을 이렇게 살아 있게 만들어준 그 규율에 대한 무한 사랑을 느끼며 감사해 한다. 이런 도착된 현상을 놓고 사람들은 그 보호 시설 안에서 이루어진 폭행과 획일적 삶에 대한 강요 때문이라고 하곤 하는데, 근본적으로 보면, 그것 때문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규율이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도덕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자비가 만들어낸 개체적 자긍심의 상실과 무기력이 궁극적 원인으로 작동한 결과여서 그런 것이다. 이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비도덕주의자라는 내 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부정을 내포한다. 첫째, 나는 이제껏 최고라고 여겨졌던 인간 유형, 즉 선한 인간, 호의적인 인간, 선행하는 인간을 부정한다. 둘째, 나는 도덕 그 자체로서 행사되고 지배적이 되었던 도덕 유형을 부정한다. - 즉 데카당스 도덕,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 도덕을.

《이 사람을 보라》.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무엇을 향하고

무엇에 의지하는가?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작가의 이전글 니체의 눈으로 보라. 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