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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Dec 28.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5

4. 상대성

무릇 세상의 모든 가치라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 시시때때로 역사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다 보니,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돌이켜 떠올리기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어렸을 적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매일 수업시간에 그것을 검사 맡았을 때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는 국가였고, 전쟁이 날 때 유학을 접고 조국으로 돌아간 이스라엘 미국 유학생들이 삶의 귀감이었으나 지금 내 주변 젊은이들이나 나 스스로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가보다는 어느덧 시민사회, 시민사회보다는 주체로서의 개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래 전에 형성된 그 가치에 변함없이 매달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무슨 가치든 간에 그것을 주창한 시대와 장소 그리고 물질적 환경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니, 당연히 그것은 그것이 만들어지거나 통용되는 해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의 대상이 아니고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전부터 오랫동안 간직해온 그 껍질을 부수기가 쉽지 않아서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하면서 생각의 노예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그 변화를 거부하면서 왜곡하기 위해 그 위에 신성(神聖)이라는 갑옷을 입힌다. 그리고서는 역사를 초월한 무오류의 진리로 둔갑시킨다.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여러 역사적 층위에 따른 서로 다른 사실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오류와 모순들은 나중에 사제 혹은 학자들이 신의 섭리, 시대를 초월한 당위, 조상 대대로 내려온 미풍양속,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의 전통이라는 레토릭과 담론으로 정당화 시킨다. 그리고 이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 혹독한 처벌을 내린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맞춰 발을 잘라버리는 격이다. 그 제어하는 힘이 강력하고, 방식이 잔인하고 그 결과가 잔혹할수록 그 제어의 효과는 커지고 그 위상은 영원불변의 절대 진리가 된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소위 불변의 진리는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온 것이다.     

   

도덕은 시대가 바뀌면 바뀌는 게 자연스럽다. 인도의 시크교도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좋은 점을 골라 절묘하게 만든 종교인데, 처음 태어날 때는 명상과 평화와 휴머니즘을 무엇보다 우선적인 덕목으로 가진 종교였다. 그러다가 무갈제국 정부에게 쫓겨난 반란군을 숨겨주고 그를 고변하지 않은 죄로 교주가 처참히 참수되어 죽은 이후 그들 공동체가 지켜야 할 덕목은 바뀌었다. 더 이상 명상과 평화와 휴머니즘을 말하지 않고, 이젠 믿음을 지키기 위한 불굴의 싸움을 말했다. 그리고 예전의 그 덕목들은 비겁한 것으로 규정지어 졌다. 새로운 덕목으로 떠오르는 것들은 새로운 시대사의 요구로 인한 것이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한 불굴의 의지, 불퇴전의 싸움, 끝없는 희생, 남성의 용맹과 여성의 전통 수호 등이 그들의 도덕이고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지금의 시크 공동체 안에서는 복수욕, 교활함, 폭력, 음주와 육식, 지배욕과 같은 어떤 강력하고 거친 인간의 본능이 미덕이다. 처음에는 극복해야 할 악덕이었는데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시크교만의 일이 아니다.   

   

니체는 도덕이라 해서 지금 그것을 숭배하는 이들이 말한 바와 같이 처음부터 도덕적인 동기에서 기원한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기원을 살펴보면 부도덕한 동기에서 나올 수 있고, 진리에 대한 열정도 무지나 오류 때문에 생겨난 것도 있으며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니체는 사람들이 이기심, 허영심, 체념, 아무 생각 없음 등과 같은 부도덕한 것으로도 얼마든지 도덕을 만들 수 있다고 했으니 그런 것을 꼽자면 셀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지금의 맥락으로 보기 이전에 만들어지고 통용되던 당시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한 방법을 니체는 지하로, 지하로 내려가서 토대부터 살펴봐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대들보로 삼고 있는 가치들 가운데 유래가 잊혀 진 채 다른 가치들을 흉내 내고, 틀만 바꾸고, 교묘하게 비틀어 아름다운 전통과 관습의 형태로 남아 전해 오는 게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그것을 살펴봐야 한다. 이것만이 진리라고 하는 절대성을 부정하는 길이다.     


결국 소위 진리나 도덕으로 불리는 것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도덕이 아니고 불경한 것으로 전락한 것이나 진리가 아닌 오류라고 규정되는 것 또한 적어도 어떤 특정 시대에는 가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시대가 바뀌면 얼마든지 진리로, 도덕으로 널리 숭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진리나 도덕이라는 것을 널리 숭배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고, 목숨까지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가치한 일인지를 새겨야 한다. 우리가 도덕이라고 하는 범주 안에 들어가서 체험하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의 과장일 수도 있고, 하나의 축소일 수도 있다. 모두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 가치라는 것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때로는 경박하거나 분별력이 없다고 혹은 예의가 없고 경솔하다고, 혹은 만용에 젖어있다고 비판을 당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 만들어진 도덕에 얽매어 사는 것보다는 활기차게 살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게 생명력 아닌가? 생(生)이 삶인가, 도덕이 삶인가? 습관화가 된 도덕의 가치에 순응하는 것, 그것 참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 선이라고 하는 행위는 어떤 절대적 관점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때그때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의 선입견에서 벗어나고,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파악하고 규정하는 독립적인 힘을 갖추어야 한다. 자신에게 편하고 이롭게 하기 위해 그 맥락을 자의적으로 선택해서 결정하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그 자신들이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이고 참이고 도덕이고 간에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고고한 독립적인 정신, 홀로 서려는 의지, 커다란 이성은 이미 위험한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개인을 무리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이웃에게 공포를 주는 모든 것은 이제부터는 악이라고 불리게 된다. 적당하고 겸손하고 스스로 적응하며 동등하게 대하는 심성, 욕구의 평범함이 도덕적 이름과 명예를 얻게 된다.

《선악의 저편》 201.


홀로 세계일 수 있는가?

배경 없이, 맥락 없이 그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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