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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Dec 27.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4

3. 역사성

자신이 소화하지 못한다면, 레닌이 어떻게 혁명을 했고, 그람시가 어떻게 저항했으며, 간디가 어떻게 인민을 이끌어 나갔는지를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문자 그대로 그림의 떡이다. 아니 그림의 떡을 넘어 당시 각 상황에 처한 ‘그들’에게는 약이 되던 그 여러 방편들이 지금 여기 '나'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의 삶과 가치는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내 삶으로 가져와 '나'의 삶으로 바꾸어 실천해야 유효해 진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건 도리어 '나'의 삶을 무리하게 만들고 나아가 황폐화시킬 수도 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유효한 교훈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그 위에서 세계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 변화란 과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 위에서 새로운 것으로 재구축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의 시간과 장소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정태적으로 그들의 과거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감동이고 믿음이고 신앙일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는 되지 못한다. 그 실천하지 못한 채 밀려오는 감동은 삶의 도움이 못 되는 것이 아니고 삶을 왜곡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가 된다.     

 

결국 문제는 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동일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사실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겉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것들이 서로 다름을 확실하게 구성한다.  그러나 현재의 주류 담론이라는 것이 주도하는 분류와 규정에 의해 세계는 마치 단일한 것,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 당연히 이렇게 저렇게 가야만 하는 어떤 전범이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가장 흔하고 많은 사람들이 겪어봤음직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많은 사랑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그 사랑의 속성들을 추려낸다. 그러면서 사랑이란 이러하다, 저러하다, 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누군가 ‘나’ 이전에 정해진 그 규정에 따라 내 사랑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마치 여러 사람이 겪고 동의한 그 일반화 된 규정이 정답이듯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사랑의 속성으로 나의 사랑의 문제가 꼭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한 발 나아가 더 중요한 것은, 그 규정의 방편에 따라 치유되지 못한 사람은 자기에 대해 자책을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 정작 잘못된 규정으로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다. 결국 그 누군가가 만든 교조는 ‘나’의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정도를 넘어 ‘나’를 황폐화 시킨다.      


표준이란 있을 수 없다. 그 때 그 사람에겐 그게 답이고 옳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보편성이라는 전가의 보도에 기대어 펼치는 학자의 언어로 된 어떤 규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학자가 규정하는 그 언어에 '나'를 주눅 들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들과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 일반화 되지 못한 ‘나’야 말로 니체가 말하는 살아 있는 존재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각자가 ‘나’를 잘 알지 못하다는 데 있다. 그것을 니체는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도덕 가치의 역사적 근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 가치가 어디에서 기원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것이 불변의 진리인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를 상정한다. 소위 본질론을 설파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역사를 그 본질론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면서 어느덧 현실 위에서 현실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속된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안에서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고, 만물의 영장이 된다. 그래서 인간이 사고하는 이성은 세계의 기준이고, 영원무궁이 된다. 실로 거대한 오만함이다. 그런데 그 오만함은 관념의 말단일 뿐, 세계의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계는 그렇게 본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본질로 마땅히 가야 하는 당위도 될 수 없다. 본질은 허위고, 위선이고, 사람들을 오도하는 방편일 뿐이다. 진리라고 불린 모든 것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 넣고 사유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들은 고작 특정 시대에 특정인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규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흔히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달려 있고, 그 관점은 그 당대 사회의 자연과 인위적 환경이 운항하는 여러 층위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만들어져 가고 끊임없이 변해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도덕이든, 전통이든, 로고스든, 진리든 모두 똑같다. 그 불변의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자이고,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힘으로 제어하지 못하면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다.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의 도덕적 가치에 따르면 이상적 남성상은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면서 정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세계의 오지와 험지 최고의 산 등을 정복하는 것을 시대의 표상으로 삼았다. 그 시대 남성의 파트너인 여성은 현모양처로서 가족을 지키며 그 남성을 뒷바라지 하고 자녀를 시대정신에 따라 양육하면서 사는 것을 시대의 표상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요즘 우리가 하는 나지막한 둘레 길을 산책한다거나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한 부모 가정이나 비혼주의를 외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역으로 당시 그런 가치를 지금에 와서까지 여전히 목청 높여 부르짖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돈키호테 취급당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두 가치 판단 가운데 어느 하나가 틀리거나 잘못 된 것은 아니다. 그 때는 식민지 경영이 시대적 사명이었고 지금은 개인 자유의 고양이 시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가치와 이 시대의 가치는 단지 다를 뿐이다. 그 가치들이 모여 소위 도덕이 되고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은 유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덕이나 진리가 시대를 초월한다고 한다는 말인가?     


이 도덕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위세를 부리고 싶어 하는 선한 정령에게 경의를 표하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에게는 역사적 정신 자체가 결여되어 있으며, 그들이 바로 역사의 모든 선한 정령 자체에게서 방치되어버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도덕의 계보》 2.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 속에 있다가, 땅 속 깊이 흐르다가

어느덧 밖으로 솟아나오는 과정이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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