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수 Dec 27.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3

2. 학문

니체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진리’에 관한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가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어떻게 보는가와 같은 관점에 관한 것이다. 진리라는 건, 어떤 문제도 제기될 수 없는 것이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거나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갈증이 가신다, 라거나 하는 게 진리다. 그러니 결국 변하지 않는 관념 즉 고정 관념이다. 그런데 “물을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는 건 그대라서인가” 라고 시를 쓴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고 예술이 된다. 또 어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건 진리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진리는 과연 있는가? 인간과 관련한 현상 가운데 어떤 관념이 고정된 것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문제의 초점이 종교로 모이게 된다. 예수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언명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진리다. 변하지 않는 고정 관념이다.      


그런데 그 고정 관념이라는 것은 꾸준히 계승되는 성격을 아주 강하게 가진다. 그러니 그 진리는 세대에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도 전혀 의심 받지 않고 전승되고 그러다 보니 마침내는  어떤 인간 본성의 위치까지 차지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그 진리에 맞서 싸우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다. 목숨을 잃는 것이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러니 그 진리에 대적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엄청난 두려움을 야기한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파괴적인 힘을 갖는다. 제 아무리 낯설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도 그 두려움 안으로 들어가면 금세 익숙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해져버리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익숙함 앞에서 개인 삶의 주체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익숙함의 노예가 된다. 니체에 의하면 그 익숙함의 진리는 도덕이다. 선량하고 평범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이 바로 그 도덕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수가 되는 사회에서 그 진리와 어긋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사회의 악이 되거나 미친 사람이 된다.      


진리는 모든 것을 제어하고 통제하고 가두어 들이는 속성을 가져 엄청난 파괴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에너지가 현실의 땅에서 나오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척박한 땅에서 사는 삶 위에서 온갖 난관을 헤쳐가면서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서 생성시키는 것이어야 생산적인 것이 될 텐데, 존재하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곳을 향해 만들어내는 에너지이다 보니 양보도 타협도 없는 이분법 상의 두려움을 야기하는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가 옥죄는 제어의 힘에 눌려 현실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렵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여 진리를 세우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객관과 과학의 옷을 입은 학문이다. 학문은 현실 속에서 이성이라는 횡포에 저항하는 것을 악으로, 이단으로, 마녀로 규정한다. 그러니 다수에 저항하면서 소수로서의 주체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학문에 의해 규정된 악이나 이단을 만나는 것을 자신에 대한 채찍질로 여겨야 한다. 다수에 저항하는 소수는 자기편이라고 여기고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위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이 짜놓은 프레임의 관습에 순종하면서 스스로를 가두지 않아야 한다. 다만 지금 여기, 현실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관점이 무엇인지를 간파하여 생명력을 보존해야 한다. 그러면서 객관과 다수가 옥죄는 판에 파열을 일으켜 새로운 생명력이 솟구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진리를 지키는 학문이 아니고 진리를 파열시키는 이단의 힘이다. 그 이단의 힘은 결국 관점에서 나오니, 관점이 생명력의 원초가 되는 셈이다.      


예컨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인류 재난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과 생산 혹은 발전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은 인류의 적이지만, 지구의 무분별한 착취와 남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결국 지구와 인류를 보존하게 하는 좋은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문제 해결의 단초는 결국 관점이 된다. 그런데 세상은 그 관점이라는 것을 제어하는 방향으로 운항한다. 하나의 단일한 관점으로 구심력을 발휘하는 운동과 그것에 저항하면서 원심력으로 운동하는 것이 부닥쳐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데, 주로 후자의 힘이 적게 일어나고 전자의 힘에 순응하면서 전체 에너지가 왕성하게 생기지 않는다. 그 구심력 중심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종교고, 도덕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한 왕성한 이상주의와 같은 이념이다.      

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다는 ‘공산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공산주의’ 자리에 ‘민족주의’라는 어휘를 넣어도 마찬가지고, ‘기독교’를 넣어도, ‘과학주의’를 넣어도, ‘페미니즘’을 넣어도, ‘성리학’을 넣어도 다 마찬가지가 된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그 인민은 거짓말하고, 시기하고, 남을 끌어내리고, 질투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담론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본능을 애써 외면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것을 의지적이고, 진보적이고, 단일적이며, 행동적이라고 규정하면서 혁명의 주체로 상정할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게 전혀 그렇지 않다. 인민이라는 사람, 그들의 아집, 그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야말로 현실인데 그들은 이상주의의 담론에 얽혀 현실의 실체를 거부한다. 그 인민이라는 대상의 본질을 현실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한 혁명은 성공하는듯 보이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학문이 바라는 바가 바로 그런 세계다. 행복을 두려워하고, 쾌락을 경원하고, 물질을 포기하도록 하며, 현실을 자제시키는 것, 그 안에 뭔가 규정과 규범의 방을 만들어 모든 것을 규격화하고 체계화 하는 세계다. 그 원칙이라는 혹은 진실이나 진리라고 언명된 그 방 안에서 복종하고 순응하도록 담론을 계발하고 이론화 하고 체계화 하는 것이 학문이 가는 길이고 학자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학문이라는 것은 세상을 유지하는 일을 할 뿐, 세계를 창조하지 못한다. 임의대로 규정하고 임의대로 분리해서 자신이 갖는 세계관에 맞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 학문의 세계로 악을 이겨낼 수는 없다. 악을 극복하는 길은 악으로 주어진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저항하면서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 힘으로 현실 위에 서야 악을 극복하는 것이고, 학문이 규정하는 이상 위에서 서면 악에 무릎 꿇는 것이다.     


천재, 즉 생산하든지 아니면 출산하는 존재에 비하면 – 이 두 단어를 최고의 범위에서 받아들인다고 하고 – 학자, 즉 학문을 하는 평균적 인간은 언제나 늙은 처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늙은 처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장 귀중한 두 가지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악의 저편》. 206.


보는 것만 보인다.

그 강한 빛에 눈을 뜨지 못한다.

세상은 어둡고 사위는 고요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니체의 눈으로 보라.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