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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Dec 26.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2

1. 일원(一元)

내가 자주 쓰는 레토릭 가운데 하나가 ‘인간은 악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본성이 악이다, 라는 게 아니고, 인간의 여러 본성 가운데 악의 자질이 매우 강하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세계의 여러 다양한 특질들을 둘로 나누어 분간하여 판단하는 이분법이다. 그 이분의 원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종교다. 도덕 또한 일종의 종교이니 도덕도 마찬가지다. 그 종교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다수는 무기력하게 당하고, 소수는 그들을 열정적으로 착취하는 시스템이 돌아간다. 수천 년 동안 모양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변함없이 그대로 간다. 나는 속이고 착취하는 자들보다 속고 빼앗기는 자가 더 악의 근원이라고 본다. 물론 그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볼 때 그 속임을 당하는 것은 노력 없이 부당하게 득을 보려는 즉 남을 속이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실, 속임이 속음이고 속음이 속임이다.      


이런 일원론을 니체로부터 본다. 니체는 이러한 일원의 세계를 긍정한다. 존재가 생성이고, 생성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보는 시간은 순환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음이 곧 시간이 영원한 것이고, 시간이 영원한 것이 바로 여기 지금의 내 앞에 선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최종적 고정이라는 것이 없는, 변화하는 삶의 각 사건들 속에서 그때그때의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 일원의 세계 안에서 악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가 대해야 하는 현실이고 그것이 실체고 우리의 운명이다.    

  

천국이라는 게 어찌 따로 있겠는가? 그건 누군가 속이려 하는 자들이 만든 관념일 뿐이다. 그러니 천국을 사모하여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다. 현실을 사랑하는 것이 곧 천국을 지금 여기로 당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꾸 손닿지 않는 관념의 세계를 추구하도록 하는 자가 바로 악이다. 그 현실을 미워하고 없는 천국과 진리를 그리워하는 종교가 흥성한 세상, 그것이 인류 문화가 흥성한 것인가? 종교가 흥성하여 문화가 꽃피고, 보편적 복지가 발달하고, 더 많은 노동을 함으로써 물질적으로 더 잘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을 긍정한다면, 당신은 아편에 중독된 것이다. 그 아편은 세계를 둘로 나눠 그 안에서 인간을 뒤로 팽개치고, 미움과 갈등과 차별과 지배를 앞세우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이간질 하는 것이다.      


어떻게 여성과 남성이 갈등의 관계이고, 낮과 밤이 적대적이란 말인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 생명이 태어나지 않던가? 이보다 더한 우주의 이치가 있을까? 생명과 죽음은 대립하지 않는다. 둘은 하나이니 생명은 죽음을 포함하고 죽음은 생명을 낳는다. 이 변화는 특정한 어떤 존재의 뜻이나 의도에 따른 어떠한 목적이 없다. 그래서 우와 열도 없고, 잘잘못이 있을 수 없다. 다만 하나의 무구한 흐름일 뿐이다. 그것이 세계고 그것이 자연으로 수렴되는 일원론의 이치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던가? 지금까지 몇 십 년을 살아보고 묻는 것이다. 여자만 구미호 백여우고 남자는 그렇지 않던가?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어떤 유행가 가사에 절절히 격하게 동의하지 않았던가? 살보고 겪어보니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인간은 참으로 여러 껍질에 싸여 있더라. 아무리 벗기고 또 벗겨도 이것이 바로 ‘나’라는 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결단코 없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파헤치기 위해, 벗겨내기 위해 직선 코스 절벽을 타고 그 심연으로 내려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그런 일을 감행하면, ‘나’를 찾았든 못 찾았든 ‘나’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 결국 그로부터 회복 불가능한 단계로 빠지게 된다. 직선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나’든 ‘너’든 규정하는 것을 하면 안 된다. 니체는 ‘자아’란 우리의 체험에 덧붙여진 하나의 ‘주석’이며 우리 ‘자신’이라는 분명한 철자에 대한 오독이라고 했다. 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이 섞여 있는 ‘자아’를 누군가의 개념에 혹은 그 여럿 중의 하나에 불과한 어느 ‘나’에 의해 억지로 찾아 가상 존재로 명명이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어떠한가? 그것도 마찬가지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금방 임용된 교수의 눈에는 세상은 봄이요 인생은 총천연색 꽃밭이겠지만, 금방 억울하게 해직된 교수에게 인생은 겨울이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회색 산등성이 아니겠는가? 건강한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와 우울증에 걸린 혹은 광기로 쌓인 사람이 보는 세계가 동일하겠는가? 광기로 가득 찬 사람이 보는 세계가 전체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한 사람이 보는 세계가 전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그 둘 혹은 나아가 더 많은 여럿의 세계는 하나로 대표되고, 일반화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시도하고, 거기에 익숙하게 되는 것은 현실을 좌지우지 하는 권력이 그 이분법을 즐겨 사용하여 지배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이데올로기적이든 권력을 쥔 자가 보는 관점이 도덕이고 종교고 진리가 된다. 광기로 충만하거나 병에 무너진 사람이 보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도록 간주되어야 하고, 나아가 권력이 만든 그 이분의 세계에 저항하는 자들을 광인이나 병자로 모는 것이 이 세계의 이치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메커니즘에 따라 간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이분의 논리를 니체는 단호히 거부한다. 어린아이에게서는 유치함이 아니고 천진난만함을 보고, 노인에게는 노쇠함이 아닌 원숙함을 보듯 니체는 각각이 처한 위치에서 나름의 통찰을 얻으려 했다. 모든 이의 관점은 모두 다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고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럿을 하나로 묶지 말고, 둘로 나누지 말고, 그것으로 강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명은 특히 인터넷이라는 매체로 모든 것이 연결되고 사회가 극도로 원자화 된 현대 사회에서 더욱 절실하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모든 정보가 다 공개되고, 획일화 되고 보편화된 사회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관점이 다. 자신의 관점이 없고 모든 것이 데이터로 일반화 되면 ‘나’는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러면 그렇게 사는 이유가 사라져 버린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본질적 질문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실제의 사물들이 인간의 행복에 더 많이 기여했는가? 아니면 상상의 사물들이 더 많이 기여했는가? 최고의 행복과 최고의 불행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의 넓이는 상상의 사물들을 통해 비로소 생겼다는 것이다 ...... 우리의 감각이 하나의 해석이다. 우리는 해석된 사물을 체험하므로 우리 세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그 무엇보다도 해석자인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천국과 지옥이란 결국 동일한 세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체험, 상반된 해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광》 7.               

모든 것은 다 엉켜 있고, 돈다.

분간하려 하지마라

세계는 회색이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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