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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Dec 26. 2020

니체의 눈으로 보라. 1

들어가며: 왜 니체와 사진인가?


1.

내가 조만간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어려운 요구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기에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 내 습관이 거부하고 내 본능의 긍지는 더욱 거세게 저항을 해대지만, 말하자면 다음처럼 말할 의무가 있다: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 ...... 우상('이상'을 표현하는 내 단어)의 파괴 - 이것은 이미 내 작업의 일부이다. 이상적 세계가 날조되었던 바로 그 정도만큼, 실재의 가치와 의미와 진실성은 사라져버렸다......’참 된 세계’와 ‘가상 세계’ - 사실대로 말하자면: 날조된 세계와 실재 ... 이상이라는 거짓말은 이제껏 실재에 대한 저주였고, 이 거짓에 의해 인류의 가장 심층적인 본능마저도 부정직해지고 그릇되어버려 – 인류는 그들의 성장과 미래와 미래에 대한 고도의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가치를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람을 보라》. 서문.     


니체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 그 덕에 좌충우돌하면서 때로는 진지하게 모질게 살아보기도 했고, 때로는 광대처럼 돈키호테처럼 튀면서 살아보기도 했다. 어찌 됐든, 나는 비교적 평탄한 대학교수로서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그 안에서 비주류로서 힘들게 사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가끔 비참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니체를 한 번씩 읽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책은 설명하지 않고, 분석하지도 않고, 논증하지도 않는다. 앞뒤가 논리적으로 꼼꼼하게 연결되지도 않는다. 아무렇게나, 아무 부분이나 꺼내 내 맘대로 읽고 소화할 수 있어서 좋다. 그 덕분에 읽고 사고하는 습관을 오랫동안 띄엄띄엄 방식으로 해 온 듯하다. 그건 일종의 나를 위한 기우제인 셈이다. 그것은 제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하다 할지라도 난, 누군가의 언명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바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않는다. 내가 해석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와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비가 오듯, 내 상황에 맞는 해석이 나오게 되어 있다. 니체가 말하는 바에 따라 내가 내 마음대로 읽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니체를 읽는 이유다. 결국, 해석이라는 이름을 빌린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 합리화가 난관에 부닥쳐 처참함에 이를 때 피곤해 하는 내게 힘을 넣어주기 딱 좋은 것이라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2.

이 책을 집필하려 마음먹은 다음 날, 영화를 봤다. 《토리노의 말》. 오밀조밀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면이 눈요기를 주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장면 몇 개 이어 놓은 것일 뿐인데,  참으로 눈을 뗄 수 없다. 두 시간 동안의 지적 노동을 화끈하게 경험한다. 하나는 니체가 그 안에 있고, 또 하나는 ‘해석’이 그 안에 있어서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니체가 실제로 겪은 토리노에서 일어난 어떤 말에 대한 일화를 모티프로 삼아 만든 영화다. 니체는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어떤 마부가 자기 말을 듣지 않은 말에게 심한 채찍질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니체는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더니, 팔로 말의 목을 감싸 안고 흐느꼈다. 누가 봐도 미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떼어내 집으로 데려왔고, 니체는 침대에서 이틀을 누워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니체가 공시(公示)된 실제적 사건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10년, 니체는 정신이 나간 상태로 가만히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한다. 그의 모든 저작은 이 사건 이전에 쓰인 것이다. 비교적 잘 알려진 저작물 가운데 《비극의 탄생》은 초기 1872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883~85년에, 《이 사람을 보라》는 말기인 1888~1889년에 저술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아무 저작 활동을 하지 않더니 이내 세상과 하직한다. 이 영화는 그의 저작이 온전히 마무리 되지 않은 그 10년 독거로의 철수 사건 직전의 한 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감독이 철저하게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만든 영화다. ‘해석하라’는 니체의 최대 언명이니, 니체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다.     


토리노 일화 속의 말은 젊은 니체가 상정한 실존 인간일 것이다. 인간은 진보로, 이념으로 세상을 넘어서려 하지만 결국 마차에 묶인 말처럼 고통을 피하지 못한다. 아무리 넘어서려고 노력해도 인간은 신이 될 수도 없고, 세상의 구원자가 될 수도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마부의 채찍에도 꿋꿋이 채찍질을 당하면서 버텨야 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노예 관계를 거부하는 자유정신이다. 니체가 실제로 말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한 것은 채찍질에 고통을 겪는 말에 자신의 자유정신으로 체화된 실존 인간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는 이번에는 마부가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아무 이유 없이 집시들의 저주를 받아 우물이 마르고, 유일한 생존 수단인 말은 식음을 전폐하면서 결국 죽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시도해보지만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어 다시 이 황량한 곳으로 돌아온다. 왜 그에게 이렇게 고통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는 그 설명과 논리적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다가오는 고통을 겪으면서 앞으로 갈 뿐이다. 영화는 그것을 보여준다.      


난, 이렇게 해석한다. 위버맨쉬(Übermensch)는 – 흔히 ‘초인’이라 부르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극복하는 자’로 보는 해석이 더 타당하게 보인다. - 붓다의 니르와나(Nirvana와) 같이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룰 수 없는 상태다. 어떻게 보면 니체가 비판한 ‘관념’이라는 것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강한 개념은 젊은 시절 니체의 산물이다. 니체는 병들고 죽어 일종의 요절을 하느라, 늙어감이라는 자연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니체의 저작은 모두 혈기 왕성한 시절에 나온 것들이다. 늙은 후에는 당연히 그 생각이 적어도 일부만이라도 변하거나 흔들렸을 수 있다. 그것은 니체 스스로 말한 주체의 변화를 대입해보면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경험을 제대로 겪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이 간파한 상대성을 인정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늙기 전에 정신이 나가버렸고, 이내 죽었기 때문이다.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다. 젊은 예수의 행동이나 바울의 사상은 한 때의 세계관이다. 그 세계관은 변할 수밖에 없고 실제 크게 변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초기 역사에서 만들어진 그 때 그 세계관을 근본으로 삼고 산다. 역사성을 거부하고 근본성을 숭배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종교의 모습이다. 변화된 것을 거부하거나 변화된 것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때의 세계관이 근본이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것은 니체가 간파한 반(反)종교, 반(反)도덕의 입장의 기반이다. 결국 종교든 도덕이든 관습이든 해석이어야 한다. 기독교도 그렇고 니체 철학도 마찬가지로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난, 그 위버맨쉬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해석의 여지가 만들어졌으리라 본다. 그게 니체 철학의 완성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그것을 니체로부터 받지 못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내 스스로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책은 니체의 텍스트에 대한 내 해석이다.     


3.

영화를 보고 한 동안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저 별 거 아닌 이미지의 연속, 다 알고 있는 이야기, 별 다를 바 없는 해석, 그럼에도 무엇이 이토록 나를 그에게 열병처럼 붙들려 있게 하는가? 니체에게서 개념은 이미지다. 감각이다. 그리고 텍스트가 아닌 해석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꼭 저런 영화를 찍고 싶어졌다. 저 영화보다 더 해석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그런 영화를 찍고 싶었다. 빈 종이에 그려 보니 대충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힌다. 그러면서 피시식 웃고 말았다. 영화는커녕 동영상도 찍을 줄 몰라 학생들 비대면 영상 하나 제대로 찍지 못하고, 죽을 둥 살 둥 난리를 치곤하는데 ... 돌이켜보니 아무 가능성 없는 그저 즐거운 몽상이었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휙 지나갔다. 그래, 영화만 이미지가 아니지. 사진도 이미지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면서 바로 사진과 글로 구성하는 ‘나의 니체처럼 보기’가 구상되었다. 니체가 설파한 세계관을 여러 주제로 나눠, 그의 뜻도 살피고, 나의 해석도 보태고 그것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두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구상이다.

      

두 장의 사진은 해석의 바다로 삼고자 한다. 사진에 제목도 없고, 주제도 없고, 그에 따른 글도 없고 그 어떠한 맥락도 없다. 그저 사진가인 내가 니체의 글과 동일한 맥락으로 사진을 두 장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보이는 것일 뿐이다. 때로는 비슷한 기표로 읽히는 두 장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전혀 다른 기표의 두 장일 수도 있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기표를 넘어 2차 기의, 3차 기의까지 갈 수도 있다. 더 심한 경우에는 두 장의 형식으로 – 이걸 딥틱(dyptich)이라 부른다. - 상호 느낌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까지 합치면 그 해석과 느낌의 경계는 가히 막힘이 없을 것이다. 이걸 보여주고 싶다. 자유로운 해석과 느낌의 바다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정한 수준 이상의 사진 읽기 공부를 한 독자나 사진가들에게 적절한 수준이다. 그 외 보통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방식의 두 장의 사진 읽기는 너무 가혹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지은 3행으로 된 아포리즘을 덧붙인다. 그에 매이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4.

모든 논리 그것도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논리는 그 배후에 여러 가치 판단들이 존재한다. 논리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현실을 극도로 단순화하며, 그럼으로써 현실을 일목요연하게 만든다. 이러한 단순화는 사실 허구다. 그것은 체험과 경험에 있어서 모든 개체적 조건을 벗어나 보편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논리를 의사소통이라는 목적을 위해 오로지 피상적인 것으로만 사용하는 한, 그 논리라는 것은 명명백백하게 지시할 수 있는 기술일 뿐이다. 그런데 지시 밖의 어느 공간에 있는 소통과 공감을 가져오는 게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삶이 과학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예술도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예술은 잠시 어느 한 때는 일반화로 갈 수 있겠지만, 작가나 비평가의 ‘표준’ 해석에서 벗어난 또 다른 해석이 치고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금세 새로운 영역이 일어나고 그것이 두어 번 일렁이면 또 다른 경계를 훌쩍 더 넓히곤 한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에는 예술이 꼭 붙었으면 한다는 생각을 오랜 동안 해왔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내가 지난 10년 동안 부산의 곳곳에서 찍은 사진을 가져 온다. 철학과 예술의 만남이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지시성이 있고, 프레임으로 대상을 끊어 재현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라도 은닉성과 그로부터 모호한 성격이 발생한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장의 사진을 가지고 글이 갖는 지시성과 논리로 인해 발생하는 보편화를 벗어나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아무 논리적 귀결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와 두 개의 이미지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창조해내는 해석의 새로운 여지를 여는 전혀 새로운 하나의 예술 작업이다. 니체를 읽고 나만의 독해를 하면서 생략되고 감추어진 혹은 방치된 조각들을 두 장의 사진과 함께 살피는 것, 이것이 작가로서 하고 싶은 말이다.     

  

5.

아이러니하게도, 니체를 아는 사람들은 대개 그가 말하는 아포리즘 같은 것으로 자기 성을 쌓고 싶어 한다. 어떤 해석과 느낌의 세계를 닫지 않고 자유로이 토로할 수 있는 형식은 아무래도 아포리즘이 제격이다. 아포리즘은 논증이 아니므로 뭔가에 호소할 필요도 없고, 제청하고 박수치거나 손사래를 칠 필요가 없다. 아포리즘은 감각적이다. 니체의 섬광들은 우리의 이성과 감각의 뿌리를 뒤 흔든다. 아포리즘이라 더욱 그렇다. 사진이야말로 아포리즘이다. 니체를 사진으로 말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나는 인도 종교의 역사를 연구하는 대학 교수 연구자이지만 사진비평가이기도 하다. 그 비평의 매개는 주로 글이다. 그때마다 글을 어떻게 쓸 것이냐의 형식 문제에 부딪힌다. 단순히 산문으로 쓸 것이냐, 아포리즘 비슷하게 쓸 것이냐의 문제도 있지만, 담론으로 무겁게 갈 것이냐 페이스북 포스팅 하듯이 가볍게 갈 것이냐는 문제를 염두에 둔다. 그 재현의 정도를 결정할 때 글도 그렇지만 사진도 마찬가지다. 우선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우선이다. 해석의 여지와 영어로 터치(touch)가 발생하는 글과 사진이어야 작가가 원하는 메시지와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똑같은 스타일의 글, 말, 사진은 보편적이고 획일적이어서 무난하지만, 그런 식의 작업은 하지 않는다. 무난하고 원만하게 전달하는 방식은 죽은 방식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생명력은 나는 나대로 글과 사진을 통해 니체를 읽고 해석했지만, 독자는 독자대로 내 글과 사진을 읽고 해석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고 내가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인문학과 예술은 지식과 삶을 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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