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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30.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45 ... 연재 끝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봄'에 관한 이 세계의 이치다. 사진을 매개로 하여 말하자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물에 대해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카메라의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카메라의 눈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사람들이 보도록 재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모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기계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즉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대상 가운데서 무엇을 보느냐, 부터 이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이와 관련하여 힌두 세계의 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이 그렇게 보는 것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드러내는 것이니 그의 뜻에 따라 그 성안聖眼을 알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본질을 볼 수 없으니, 돌을 깎아 만들 든, 나무를 잘라 만들 든, 붓으로 그리든, 카메라로 찍든 그 상을 만들어 그 신을 보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성안의 '보여 줌'이 있고, 그 연후에야 비로소 인간이 하는 알현의 '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보여줌과 봄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이다. '봄'과 '보여줌'과 '보임'의 세계, 그것은 신에 대한 알현은 인간의 주체이지만, 신의 주체이기도 해서 결국 하나가 되어 가능해지는 것이다.     


‘봄’의 문제는, 그래서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인간을 보든, 자연을 보든, 신의 상을 보든 그것은 본질이 드러내는 것을 알현할 뿐이다. 그것을 숭배하거나 보존하거나 하는 것은 어떤 우열을 가리거나 그 질의 규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난 모습을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본질을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본질을 알현하려 하지 않고, 드러난 모습을 숭배하려 든다. 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것을 숭배하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하는 짓이다. 종교가 그렇고, 사진하는 것도 그렇다. 사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은 카메라라는 도구로 뽑아낸 이미지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왜 그 많고 많은 도구 중에 사진이라는 것을 택하는가? 그 카메라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사진가는 가장 우선적으로 이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한다.      

여인들이 최고로 좋은 날, 최고의 꼬까옷으로 치장하고 나섰다. 힌두 남성성이 아주 강한 라즈뿌뜨Rajput 힌두 여인들이 이슬람 유적지 타지마할을 새해 첫날 찾은 것이다. 해외토픽의 시각으로만 보면 힌두 여인들이 왜 새해 첫 날 무슬림 유적지를 찾을까,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시각은 자신이 세계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일 뿐이다. 사실은, 저 여인들은 이곳이 힌두 유적지든 무슬림 유적지든 상관없이 그냥 친척 일가와 함께 유람나온 것이 전부다. 산다는 것이 다름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삶일 뿐. 종교가 이렇네, 저렇네 하는 것은 정치인들이나 하는 짓이지, 저 순박한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다. 보는 것이 힌두 유적이든 이슬람 유적이든 그것이 뭐가 중요한 일이겠는가? 그 생김이 힌두 신상이든 이슬람 유적이든 그 안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시는 신의 모습으로 알현하면 될 일이다. 그날 그들이 알현한 것은 일가친척 모두 모여 즐겁게 나들이 하는 것이 신의 뜻이고, 그 신의 뜻은 이슬람 유적을 통해서도 신이 보여주시니 그것을 알현하면 될 일이었다.      


갓난아이들을 안고 서 있는, 그러면서 스카프로 낯을 가린 저 젊은 여인네들의 울긋불긋한 저 옷들의 향연을 보면서 탈경계의, 분간할 수 없는 세계를 보았다. 선과 악, 미와 추,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 구원과 단죄 ... 끝없이 어이지는 둘로 나뉜 세계를 과연 구별할 수 있을까? 결코 하나로 합체하지 않는, 그러면서 상황에 따라 그 둘이 조합해 나가는 것이 달라지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또 변하는 세계.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이 세계를 둘로 쪼개어 처단하고, 단죄하고, 지옥 불 못에 빠트리고, 독점하고, 배제하면서 우리 사는 세계를 악의 터로 만들어버림을 읽는다. 저 여인들이 무엇인지, 무슨 장면인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지, 그 속내는 무엇인지를 난, 알지 못한다. 세계는 사진에 나타난 저 여인네들처럼 규정할 수 없다. 본질 없고, 실체 없는 영원한 변화가 끝없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것을 난, 알지 못한다. 그 안에서 욕망은 검버섯처럼 커져 간다. 그것이 악이다. 인간이 악이니, 세계가 악이다. 어렴풋이 알 뿐이다.

    

'봄'과 '보임'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 봄'의 차이는 일관성에 대해 어떻게 사유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세계는 정체성에 있지 않고, 실체의 세계에도 있지 않다.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재현하여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최고의 인문은 '봄'의 세계다. 당신, 카메라를 든 당신은 세계에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당신이 보고 싶은 것을 어떻게 보여주려 하는가?   

  

이것은 해석이지, 텍스트는 아니다. 

니체 《선악의 저편》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아그라,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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