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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9.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44

1857년 세포이 항쟁이라고 널리 알려진 봉기가 이곳 갠지스 강 중류 유역의 도시 깐뿌르Kanpur에서 불길이 본격적으로 타 올랐다. 봉기군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함락했고, 델리를 향해 진격했다. 영국 동인도회사 군은 모두 퇴각하여 강 건너 다른 곳에서 반격 채비를 갖추었다. 전쟁 중이었으니 무슨 도덕이 있었고, 무슨 금도가 있었겠는가? 봉기군은 이곳 갠지스 강가에서 영국군과 가족 포로 200 명 가량을 학살했다. 그리고 학살이 있은 후 몇 개월이 지나 강을 따라 저 밑에서 올라온 영국군이 이곳을 다시 함락했다. 그 밀고 밀린 싸움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또 죽어나갔다. 전쟁이란 으레 학살이 있는 것이니...지금, 내가 돌아다 보는 이곳, 도처에 무수한 사람을 죽고 죽인 곳이 역사 유적지란 이름으로 널려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게 이 성당이다. '모든 영혼의 성당'이라는 이름의 이 교회는 영국군이 그 적 일당을 처단한 강 바로 옆에 세워졌다. 모든 희생자들의 영혼을 빈다는 차원으로 세워졌지만, 물론 인도인들 영혼은 제외돼 있다.

     

저녁이 오기 직전, 늦으막에 저 을씨년스러운 교회를 찾았다. 사방은 모두 문이 닫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담장의 원래 의도와 관계없이 내 느낌으로는 담장은 인도인 영혼 출입을 금지하는 것으로 읽힌다. 교회 주변에 불이 하나 씩 들어온다. 불빛이 갖는 원래 속성과 관계없이 내 눈에는 죽은 모든 영혼으로 다가온다. 카메라를 대고 셔터를 누른다. 구도고 노출이고 별로 손을 댈 게 없다. 굳게 닫힌 철문 사이로 찍으니 저렇게 찍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무슨 스킬을 발휘하고 싶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평범한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뿐이다. 다른 사람과 달리, 내 주관으로 찍고 싶은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을 내 주관으로만 보고, 남기고 싶지 않다. 사진이라는 게 원래 어떤 사건에 사진가가 개입할 수 없는 것만 남는 것이다. 그 사건에 사진가가 개입을 하게 되면 이미 그 사건은 다른 사건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사건에 개입을 하는 권력이 사진가에게는 이미 크게 들어와 있다. 사진가가 갖는 시선에 따라 그 사건을 규정하고 재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볼 때 매우 모순적이다. 사진을 읽는 사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가의 시선을 무시하고 주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진이 태반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객관적으로 읽어낼 수는 없다. 그 대상을 보면서 읽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를 읽거나 따라가는 것이 항상 좋은 태도는 아니다.    

  

어떤 사건을 접하고 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실제는 아니다. 실제는 그 자체로서는 행동을 구체화 시키지 못한다. 사건을 접하고 난 후 그 동안 우리 안에 오랜 시간 동안 자리 잡고 있던 여러 가지의 생각들, 관념, 이념, 염원 등 생각의 부류들이 우리를 구동시킨다. 이를테면 생각과 같은 것들이 실제를 활성화 시키는 구동장치가 되는 것이다. 슬픔이라는 것을 한 번 보자. 슬픔은 실제지만, 그것을 체화시키고 행동하게 하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이론이나 상징 혹은 주장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는 그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그 당사자와 본질적으로 하나 되지도 않는다. 사건을 접할 때 가슴이 뛰는 것은 십자가든 불상이든 노란 리본이든 예배당이든 그러한 상징물을 통해서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슬픔을 잊으려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애도가 되지 않고, 갈등만 커질 뿐이다. 상징과 이미지로는 본질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그 이미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본질은 건드리지 못하고, 외형만 무심하게 그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카메라 앞의 대상이 슬픔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그 흔적을 남긴 사진으로는 그 슬픔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그냥 평범하게 보고 기록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지금이 딱 그 때다. 그 역사의 슬픔 앞에 사진가는 작품을 하는 사람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고 싶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다. 사진가 앞에 서 있는 모든 게 작품이 대상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 우선이고, 평범의 일상이 우선일 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예술적 태도를 갖는 사진보다 그 대상을 대면하고 그에 대해 반추해보는 것이다.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해 평가하고, 옳고 그르고를 규정하면서 언어의 날을 세우는 것도 사실 반추해보면 허탄한 일이다. 그 죽음들 앞에 우리 편과 당신 편이 갈라져 있는 것 또한 허탄한 일이다. 무수히 흘러간 버린 그 시간 속에 사라져 가 버린 생명들 속에 남은 건 저 성당 같이 이념의 산물로서 흔적밖에 없는데, 그에 관한 무수히 많은 비판과 옹호가 또 허탄한 일이 되고 만다. 대관절 역사가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이기에 ... 이런 생각에 잠겨 본다. 모든 것이 무섭지만, 내가 갖는 의지와 신념에 따라 반추하는 것이 더 무서워지기도 하다.     

 

직면에 대해 자신이 없으니 비극의 현장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그 비극의 현장에 가서 카메라를 든다는 것, 나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세월호 참사 5년이 지난  날이다. 아직  진도 팽목항에 가보지도 못했고, 여전히 대면할 자신이 없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며, 수치의 마음은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며, 공경하는 마음은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며,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 

《맹자》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깐뿌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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