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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8.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43

세상은 옳고 그르고가 명확하게 갈릴 수 없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옳고 그르고로 단정 짓는 것을 좋아한다. 옳으면서 그르고, 그르면서 옳은 세계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다중적이고 이질적인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거부한다. 남성 안에 여성이 있고, 밤이 품고 있는 새벽의 세계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옳은 것은 옳아야 하고, 틀린 것은 틀려야한다. 현실이 어떻든, 진실이 어떻든 그건 관계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군사 독재에 시달리면서 그 험난한 역사를 헤쳐 오다 보니 그들을 닮아버렸다. 그 군사 독재자들에게 국가는 항상 옳고, 국가가 하는 일에 국민은 무조건 희생해야 했다. 그들에 저항한 민주 투사들은 한 번 길을 갔으면 그것으로 끝장을 봐야 했다. 중간에 그만 두고, 세계관이 바뀌면 변절자, 배신자로 전락한다. 그래서 오로지 의리고, 오로지 우리다. 한국 사회의 극단 대립과 갈등은 여기에서 나온다.      


사진은 이와 크게 다르다. 이미지 안에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있는 현상 그대로 이지만 사진가의 시각이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의미 부여가 새롭게 이루어진다. 사실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고, 해석으로 바뀌어버린다. 사진가는 사진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 지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있는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방식대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프레임 안에서 재배치하기도 하고, 노출이나 톤을 조절하여 자신이 원하는 그 이미지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찍는다. 화가가 캔버스에 붓질을 수도 없이 하고,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리고, 다시 하고, 도공이 도자기를 굽고, 깨버리고, 다시 굽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자기 시각에 따른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진이라도 그 해석이 없는 것은 없다. 그 해석이 객관이나 평균 혹은 일반이라는 범주가 만든 목소리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해석이고, 전통을 파괴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자기 해석이다.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건 전적으로 그 사람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피부가 검은 흑인의 피부색은 그 사람의 개별 속성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피부색이 백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흑인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 '흑'이라는 사실은 빛을 매개로 우리 눈이 반응한 그리고 다른 '백'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한 현상일 뿐, 그 사람의 고유 속성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다. 그렇게 파악하는 것은 지독한 인종주의 사회에서만 주목받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마치 원래부터 그러한 것처럼 규정을 한다. 우리가 지금 가진 많은 시각들이 아주 오래 전 고대 사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 때에도 통용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기지다. 예의나 도덕이 그렇고 여성의 위치가 그렇고 종족으로 편 가르기가 그렇다. 많은 현상이 지금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하나의 사회 관계 현상일 뿐이다. 근대 이후 사회가 만들어낸 전통인데도 그것이 마치 고대 사회에 있었던 것인양 부회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화를 만들어내 권력을 취하려는 것이다.     


2009년 바라나시를 찾았다. 카메라를 들고 릭샤(자전거 인력거)에 올라 타 시장 통을 돌아다니던 때다. 릭샤가 신호등에 맞춰 정지하는데, 교통순경 옆에 선다. 그러자 바로 내 눈 높이에 경찰의 총이 들어온다. 그때 나는 며칠 동안 인도가 테러와 종교 공동체 갈등이 심각한 사회정치 문제로 번져가고 있음을 걱정하던 때였다. 무슬림을 살육하고 권력을 잡은 정권에 저항하여 파키스탄의 테러리스트들이 인도까지 처들어와 호텔을 점거하여 테러 인질극을 벌인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은 때여서 마음이 무겁고 또 무거웠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총을 보니 바로 카메라로 포착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저 총은 내가 걱정하는 그 공동체 간의 폭력 갈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저 교통순경으로서 갖추고 있는 평상의 일부다. 하지만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래서 저 순경의 총을 한 중심에 놓고 찍었다. 사실은 진실과 관계없이, 카메라를 든 나에 의해 철저하게 해석되고, 전유되었다. 난,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본 것이다. 사진을 통해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였고, 그 상상을 통해 역사에 참여하였다. 사진은, 다만, 말을 하지 않으니 그 속내를 아무도 모를 뿐이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바라나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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