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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8.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42

세상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가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도에만 있는 개념이다. 그들이 12년에 한 번 씩 잠깐 산에서 내려와 모인다.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그리고 전설 속에 있는 사라스와띠 강, 세 강이 만나는 성스러운 곳에서 만난다. 정부는 이들이 묶을 거처를 강 주변에 엄청난 크기로 마련해준다. 그들이 묶는 거처는 그들의 유명도에 따라 그 크기가 정해진다. 유명한 수행자들의 거처는 정말 화려하고, 의자도 크고, 시종 같은 제자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거처는 알록알록 온갖 치장을 다 한다. 저 수행자는 선글라스까지 꼈다. 죽은 사람을 화장해서 나온 재를 온 몸에 발랐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좀 부조화다. 재를 바르는 건 공수래공수거로서의 죽음의 의미를 담는 행위인데, 화려한 치장을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언발랜스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행위조차도 세상 일의 하나일 걸로 보면 이해 못할 바 없지만, 좀 그렇다. 세상일이라는 게 다  모순 덩어리가 아닌가?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세상의 권력이 되는 것, 그건 세상 돌아가는 이치 가운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이치다.     


사진을 막 찍으려는 순간 왼 쪽에 있는 사람이 불쑥 들어와 버렸다. 그래서 사진을 망쳐버렸다. 후 보정을 하면서 지워버릴까 생각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다시 찍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수행자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였다. 비록 수행자가 사진을 찍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를 원숭이 사진 찍듯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더군다나 그가 내 카메라에 의해 조롱당할 이유는 없다. 저 수행자의 속내를 들어보지 않고 지나가는 산보객의 느낌으로 그와 그들 문화를 내 마음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아니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불쑥 끼어 들어온 저 ‘침입자’가 있는 이 사진에서 더 적절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다. 비록 미학적으로는 수준이 현격히 떨어지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해주는 존재자로서 좋은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모순 덩어리고, 그 세계는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다. 난, 이 말을 하고 싶다. 재로 회칠을 한 수행자의 하얀 몸과 온갖 장식과 선글라스로는 모순과 부조화를 말할 수 있으니 그로써 충분한다. 그런데 그 모순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세상이 우연에 의해 운항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우연의 이치를 저 ‘침입자’가 보여줄 수 있어서 만족이다. 사진을 구성하는 물성의 차원에서 볼 때는 수준이 떨어지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더 맞춤이기 때문에 난, 이 사진을 고른다. 

     

세상에서의 어떤 행위는 내 자신도 그렇고 남도 그렇고 모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의지로써 강하게 행위 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 없는 어떤 우연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 행위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컨대, 내가 탄 지하철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것은 내가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를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다. 결국 세계는 부지불식간의 연쇄다. 숙고, 신념, 이성, 필연, 결정, 이런 것들은 근대성과 과학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인간세는 과학과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을 과학과 이성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되고, 세계의 정복자가 된다.  종種을 초월한 지구의 모든 존재와 불화하고, 죽이는 만행은 인간의 의지와 이성이 역사를 추동한다는 오만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절대 선은 없다, 절대 이성도 없고. 그것은 신화일 뿐이다.     


힌두 최고의 서사시《마하바라따》Mahabharata에서는 절대 절명의 전쟁을 놓고 주사위 게임을 한다. 세상 운항의 이치 가운데 우연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메시지다. 그 안에서는 인간은 물론이고 신 또한 우연이 필연인 우주의 법에 따라야 하는 유한한 존재다. 그 신에 대해 인간은 저항할 수 있다. 우연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연 안에서 인간이 살고, 신이 죽는다. 우연이 작동해야 신은 불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안에서 인간의 능력이 계발된다. 반듯하게 정리되는 것, 이성과 과학이 만드는 세계, 그 안에는 인간이 없다. 그들은 마치 세계가 인간에게 적합하도록 창조된 것처럼 착각하며 산다. 우리가 사는 현 세계가 그러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진다.     

 

단숨에 목숨을 걸고 뛰어올라 궁극에 도달하려는 데서 오는 피로감,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이것이 모든 신들과 세계 너머의 세계를 꾸며낸 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알라하바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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