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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6.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41

사진에 대한 담론에서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고민들은 많이 하는데 그에 비해 공간에 대한 고민들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공간은 고정된 것으로, 역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파악해서 그럴 것이고, 시간은 사진이라는 존재의 흔적, 사라져버리는 그 자국을 남기고, 그것들을 통해 변화를 가져와 변증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들이 많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사진을 찍을 때 눈으로 가장 고려를 많이 하거나 고민하는 것은 사실 시간보다는 공간이다. 공간이란 생각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면, 시간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그렇지만, 생산 혹은 생명과 관련해 시간보다 더 직접적으로 피부에 닿는 대상이 공간이다. 무릇 모든 공간은 비어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을 채우는 것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사진가가 어디를 가나 공간의 성격에 눈을 집중하고 생각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빈 것을 채워가면서 만들어지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고, 이는 다시 삶의 궤적과 관련된다. 그렇지 않은 공간은 사실 사진의 대상으로 별 의미가 없다. 공간은 곧 삶의 흔적이 된다.

      

여느 사진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어느 도시를 가면 주로 시장통을 자주 찾는다. 그 이유는 아마 그곳에 삶의 궤적이 생생하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은 다양한 삶이 다양한 공간으로 양식화 되어 나타나는 곳이라서 사진으로 담기에 참 다채롭다. 인위적이지만, 도시의 다른 공간들에 비해 더 획일적이지도 않고, 어떤 기획에 의해 통제되는 정도가 적어서 삶의 여러 양식들을 날 것으로 보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공간을 단순히 물리적인 어떤 장소나 지리적인 위치로써 파악하지 않는다. 공간은 인간의 실천이라는 요소가 직접적으로 들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 인간과 외부와의 관계를 드러내보는 곳으로 본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 인간이 처한 사회적 관계 혹은 주체의 정도를 파악하고자 한다. 사진하는 사람으로서 시간은 1년이든 10년이든 그 흐름을 겪으면서 파악해야 그 의미를 잡아낼 수 있지만, 공간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눈앞에서 바로 당장 파악할 수 있어서 더욱 관심을 갖기가 쉬운 것도 있을 것이다.      


바라나시의 어떤 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눈에 확 들어오는 공간을 하나 만났다. 하나의 층을 인위적으로 둘로 만든 곳이다. 어엿한 1층이지만, 지하 느낌이고, 2층인데 꼭 1층 같다. 아래에는 자전거를 고치는 장인이 노동하며 사는데 그 머리 위로 작은 힌두교 사당을 하나 이고 있다. 전형적인 근대의 풍경이다. 공간은 원래 사람이 사는 공동체 안에 위치하고 그래서 그곳의 삶과  관련된 사람들이 만든 성격을 겪지 않고서는 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장소성은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주변과 관계를 맺어야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다 근대 이후 많은 곳에서 물질과 정신 양자 간의 조우가 없이 그저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져버린 곳으로 바뀌어버렸다. 장소이되, 비장소가 되는 공간이다. 수퍼마켓 같은 곳에서는 사는 사람도 있고 파는 사람도 있지만, 둘 간의 접촉은 없다. 돈이나 카드만 교환될 뿐이다. 사람은 사라지고, 손님과 점원만 있고, 승객과 운전사만 있으며, 환자와 의사만 있다. 인간이 살기 위해 만들어냈으나 인간 사이의 벽이 갈수록 커지면서 결국에는 인간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내가 보는 저 희한한 곳은 장소가 비장소로 가는 도중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시 시장에 있는 가게이니 사람들과의 장소적 만남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스쳐 지나가버리는 관계뿐이다. 그렇지만 릭샤를 수리하러 오는 사람들은 손님이면서 친구가 된다. 둘은 비즈니스를 하지만, 그나마 인간의 정을 나누는 관계다. 그렇지만 요즘은 점차 그런 관계가 사라져 간다. 피할  수 없는 근대와 자본주의의 파장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힘없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땅 속으로 들어가고, 죽지 않고 같이 살자는 말을 하기 위해 건물 옥상으로, 망루로, 교회 첨탑으로 올라간다. 아무도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귀머거리 장님의 세계다. 모든 곳이 장소는 탈각되고 비장소만 첩첩이 쌓인다. 그러면서 인간은 사라지고, 돈만 남는다. 분명하게 일상에서 보는 흔한 공간의 풍경이지만, 결코 인간이 자리 잡지 못하는 곳이다. 그 희한한 풍경은 다만 익숙해 져 갈 뿐이다. 내가 카메라를 메고, 언캐니 한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은 세상이 언캐니 한데 다들 그 아에서 너무나 편안하게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언캐니함을 말하려 하고 싶어서다. 눈앞의 저 하나같은 두 공간,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사라져버릴 운명이 주는 공간의 언캐니한 느낌은 순전히 나의 몫이기만 할까?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없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만나기, 각종 치료 요법 없이 고통을 겪어내기, 의료의 감시 하에 이루어지는 살해보다 ‘죽는다’는 자동사로 표현되는 행동을 택하기 등의 재발견을 일부러 축복과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바라나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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