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수 Apr 26.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40

붓다가 죽은 곳.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욕欲의 불을 껐다 해서 입적入寂이라 해석하기도 하고, 니르와나nirvana로 들어갔다 해서 입열반이라 하기도 하고, 고苦를 멸滅했다 하여 입멸入滅이라 한 행위가 일어난 곳, 꾸쉬나가르Kushinagar에 갔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붓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목격한다. 황금 칠한 옷을 입고 죽은 붓다는 살아 역사하는 붓다로 누워 있었고, 온 사방이 그의 역사하심을 축원하는 봉헌으로 가득찼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수 만 리를 넘어 노구를 이끌고 온 신자들은 한 번 만 더, 한 번 만 더 붓다의 용안을 뵙고자 발을 동동굴렸다. 붓다가 이를 알면 벌떡 일어나 예수 같이 상을 엎어버리고 소리를 지를까, 혼자서 나긋하게 제자들이 지어낸 '나무아미타불'만 속으로 외울 뿐 그냥 누워 있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라 거침없이 찍었다. 나중에 보니 이 사진 한 장 건진다. 난, 왜 이 사진 한 장만 추려냈을까?     


사진가가 갖는 심정의 가장 첫 번째는, 붓다는 사람들의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몸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의도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붓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가려서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중들에 의해 그러하다는 심정이다. 그 중들이 뒷모습으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젠, 암울하다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이 변하고 새로운 가르침이 창조적으로 나왔다는 그 역사를 백분 인정하지만, 결국 붓다의 가르침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붓다가 하지 마라고 하는 것만 꾸역꾸역 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참으로 안타깝고 암울하다는 것이다. 해석이 다른 것은 좋다, 그렇다고 붓다가 신이 될 이유는 아니 궁극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이 종교가 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류사 전무후무한 한 스승의 가르침은 그저 그런 종교의 옷을 입고 화려하게 무대에서 활약 중이다. 어떤 사진은 표현 방식이 유치하고, 어떤 문법에 안 맞을 수도 있다. 구도와 톤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진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느냐이다. 그가 예술성을 추구하여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통상 그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진을 하고자 하지 않는 사진가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할 일이다. 거기에는 기준도 없고 상하 위계도 없고 권력도 없다, 상호 관계만 있을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결국 욕망으로 얽힌 관계에 있다. 욕망이 없다면 행위 하지 않을 거고, 그러면 관계도 이어지지 않을 거고, 그러면 세상의 삶도 없다. 죽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 밖의 삶,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절대 고독의 삶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 고독 속에서 싹을 돋우고 그 속에서 절대 고독으로 죽는 수밖에 없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란 없다. 세상 안의 삶은 관계를 맺어 능력을 키우고 그것으로 더 한 욕망을 키우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세상을 부인하고 절대 고독을 추구하는 것마저도 당겨 관계를 맺는다. 욕망을 버리는 것마저도 욕망 안으로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욕망이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변화다.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변태하여 커지고 그 변태된 새로운 욕망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그것이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욕망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 본성이 구체화 되도록 운동하는 힘 때문에 생긴다. 욕망은 단순한 소유를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소유를 넘어 사회 내에서 위치를 확인하고 존재감을 부각시키려고 운동하는 힘이다. 사회의 근원이다.   

  

욕망이 있는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없다. 절에 가면 이판승도 있고 사판승도 있다. 두 존재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시주 받치는 신도가 있어야 이판승도 있고, 사판승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진에는 사진작가도 있고, 아티스트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 애호가, 아마추어 사진가가 있어야 그들이 산다. 그들이 사진을 즐기고, 소비해야 작가고 아티스트고 간에 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진을 소비해야 예술도 살고 작품도 산다. 세상 일이 다 그렇다.      


받거나 교환된 선물이 사람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 그것은 받은 물건이 생명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증여자가 내버린 경우에도 그 물건은 여전히 그에게 속한다. 그는 그것을 통해서, 마치 그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 그것을 훔친 자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처럼 수익자에게 영향을 끼친다.

마르셀 모스 《증여론》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꾸쉬나가르, 2009


작가의 이전글 사진으로 긷는 인문 3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