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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5.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9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사진에 있어서 결정적 순간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결정적 순간은 역사적 의미를 탈각시키는 것이고, 그가 그런 메타 역사관과 그를 기반으로 한 미학적 태도에 너무 경사되어 있어서 그렇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는 사진가라면 누구든, 기록에 강조를 두든 문학적 표현에 강조를 두든, 다들 사진에 있어서 순간 포착을 하려 하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그렇지만, 장면 하나 하나에 미학만 있고 메시지에 의미가 없는 것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설사 아름답지는 못할지라도, 미장센 수준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난 의미가 담긴 사진이 좋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둑을 이런 저런 생각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숙소로 돌아갈 요량을 하고 길을 접으려는 순간, 아주 지저분한 수돗가에 한 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 걸 본다. 예의 인도 사람들 하듯 물을 받아 마실 용기가 없는 경우 손으로 받아멕이니, 이 엄마 또한 딸에게 자신의 손에 물을 받아 떠먹인다. 순간, 엄마 품에서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 모녀를 보는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들과 내 사이를 다닌다. 카메라로 저 둘만의 온전한 장면을 잡을 수 없다. 아이 머리와 엄마 손만 보이면 되지 않을까, 결정하고 셔터를 눌렀다. 사진이고 사람이고 중요한 건 메시지가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온전하다고 생각하고 잡힌 장면에서 별로 감흥이 없고 뭔가 부족한 듯한 장면에서 나만의 감동을 받는 경우가 꽤 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진이라는 게 결국 읽는 자의 풍크툼, 찔린 아픈 느낌과 기억으로부터 오는 아릿함이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 장면 또한 정리되지 않아서 정리 되어 있는 인위적인 모습은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느낌이 닿지 않는다. 감정은 자연에서 나온다. 감동 또한 자연에서 나오는 것은 두말 할 필요 없다. 자연이라면, 내 생각대로 재단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유일하게 남은 숭고라고 치는 어머니의 사랑을 제외하고 그 사랑이라는 게 보편적인 것으로 인류에게 여전히 유효할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 같은 건 차치하고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그래서 관대해지고, 그래서 연민을 느끼고, 그 위에서 행동하는 정도의 사랑이 살아 있기는 할까? 어떤 자잘하고 소소한 그런 것 말이다. 조국을 사랑하고 북녘 동포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한다는 그 엄청난 사랑 말고 말이다. 99살 먹은 아브라함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제사에 바쳐 죽이라는 그 엄청나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적어도 내겐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 종교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갖는 광기다. 소소한 일상에 연민을 갖지 않고 집단과 공동체에 목숨을 거는 건 집단 이기심이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자유의 조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뭔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강박의 조건과 성취의 틀 안에서 이루어내는 욕망은 사랑이 아니다. 상대의 아픔에 같이 눈물 흘리는 감정의 공유도 사랑은 아니다. 그저 이유도 모르고, 결과도 기대하지 않는 것, 연민 위에선 소통, 이해하는 데서 오는 기쁨, 그것이 사랑이다.  제 아무리 극악한 사람도 최소한 가족은 사랑한다. 물론 세상이 별스러워지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가족에 대한 사랑에 대해선 별 의심할 바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바깥에서 온갖 추잡한 짓은 다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 가족들과 더할 나위 없이 해피 스위트 홈을 꾸리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바깥에서 지위가 높고, 물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다. 


난, 그날 불교로 치자면, 저 여인으로부터 관음보살을 봤고, 기독교로 치자면 저 여인으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봤다. 저 사랑에는 조국도 인류도 동포도 대자대비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생명이 있다. 저게 사랑이다. 사진으로 보고 나니, 생각이 스친다. 사랑의 장면이 쉬 보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사랑을 보기가 어려워서 뿐만 아니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런 이유로 가슴 아파한다는 사실로 이미 충분합니다. 다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만한 보답은 있을 겁니다. 당신이 그만큼 심각하게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이미 많은 일을 한 셈이지요. 그렇지만 지금 자신의 성실함을 칭찬받기 위해서 말한 것이라면 그것은 실천적인 사랑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오직 공상 속에서만 살이 있을 뿐, 당신의 인생은 마치 환영처럼 스쳐가 버리고 말겠지요.”

도스토예프스키,《카라마조프가 형제들》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바라나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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