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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5.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8

어즈버, 라는 말을 곧잘 쓴다. 그냥 '아~'라고 하면 그 느낌이 잘 살지가 않기 때문이다. 야은 길재가 지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학교 다닐 때 배운 시조 중에 가장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는 시조다. 그건 아마 '어즈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어즈버'를 꼴까따에서 읊조렸다. 죽어 버린 도시라는 말을 하마터면 내뱉어 버렸을 뻔 한 그 도시를 처음 찾았을 때, 내가 뱉은 말은 ‘어즈버’였다. 공산당 정권 34년, 희망과 환희가 들끓던 제3세계의 중심지.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심어야 하는 정치 혁명가와 인민들의 꿈이 투표로 시작되었다가 투표로 끝나버린 곳. 어즈버, 꿈이런가 하노라. 


도처에 보이는 것은 낫과 망치로 구성된 공산당의 상징이다. 숱한 저 상징을 보면서 두 가지 심정이 떠올랐다. 아직도 살아 있구나...아니지, 저런 식으로 하니 권력을 내주지...이런 상반된 심정이 떠올랐다. 정치란 상징의 조작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징이란 이미지고 이미지는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사진 또한 이미지고 그 이미지 또한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 안에는 생명력이 없다. 


생명은 자기와 다른 것 특히 자기보다 약한 것을 죽이거나 제압해 자기가 힘을 얻는 것이다. 역으로 강한 자에게 붙거나 잠시 빌붙어서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원리다. 그 안에 어디서든 도덕의 목소리를 키울 게재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무엇을 했는가? 오로지 내세운 건 상징이고, 꿈이고, 당위다. 세계의 변화를 끌고 나가 적 세력을 제압할 힘이 없으니 결국 내적 타락으로 가버렸다. 가난한 사람은 노동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생명 보전을 위해 가진 것 그러모아 나무 밑에 좌판을 깔았다. 그 뒤로 낫과 망치가 멋드러지게 자리 잡고 있다. 저 상징에 흥분하여 몇 번은 표를 주고, 그 조직 안에 들어가 어엿한 기득권이 되었겠지. 그러나 그건 당신들의 천국에서나 있을 일이다. 난, 당신들을 혐오한다. 그 상징을 불태우고 넘어뜨리고 싶다. 그건 저 상징으로 인해 한 때나마 흔들린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흔한 수사를 넘어 보면, 인간은 그 생각을 구체화 시킬 줄 아는 동물이라는 말로 연결된다. 그 구체화는 항상 제도로 수렴되었다. 결혼이라는 것도 그 중 하나고 종교라는 것도 그렇고 공산주의라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 인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제도를 만들었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본질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더 잘 살고, 오래 살고, 더 편리해져서 좋아진 것이라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세계가 점점 더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 더 분명하다. 문제는 단 하나, 제도를 가지고 정신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머지않아 다른 문제가 생긴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이다.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이치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원인을 제도에 두고, 앞의 것과 대립하며 더 많은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만 몰두해왔다. 그러면 또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는 이전의 것보다 더 심각해진다. 이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사람 사는 세상은 짐승 사는 정글로 바뀐다. 거짓, 권력, 부패, 부도덕 그리고 폭력.      


이런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다. 물론 온전히 담아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사진의 힘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저 눈앞에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대상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을 한 상태다. 저 대상이 특별히 시간에 따라 변할 것도 없고, 저기 앉은 가난한 청년이 새삼스럽게 어디를 갈 일도 없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여러 가지로 시도해보고. 대상은 그대로 있으니,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공간을 이리저리 분할해보고, 카메라를 든 위치도 바꿔보고, 앵글도 바꿔보고 화각도 바꿔본다.  여러 가지로 시도 해보지만, 별 뾰족한 게 나타나지 않는다. 사진가가 저 대상 안에 직접 개입할 수 없으니 그 여러 가지 것들을 컨트롤 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진의 정신이 사진의 물질에 - 사회로 치자면, ‘제도’가 되겠다. - 그리 좌우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맨 처음에 본 대로 가자, 낫과 망치만 정 중앙에 위치시키면 될 일이다. 생명력은 제도나 장치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이런 마음으로 결정을 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결국 맨 처음 찍은 샷으로 이 장면 A컷을 삼는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그 현장을 엊그제 일 같이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해 카메라를 들고 한 짧은 시간에 쏟아진 사유가 벵골만 오후 잠깐 쏟아지는 스콜 같아서 그렇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인도, 서벵갈 꼴까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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