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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8.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28.

27. 몸

대학 다닐 때 불문학 강의 하시는 교수로부터 들었던 말 하나가 이상하게 오랫동안 뇌레 박혀 있다. 4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여러분은 만약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육체적 고통을 택했지만 난 정신적 고통을 택했다. 난, 육체적 고통은 비슷하게 경험 해본 적이 있었고 정신적 고통이라는 건 상상할 수 없어서 그렇게 대답을 했다. 교수는 플라톤의 이분법과 유럽인들의 정신 우위의 세계관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이 서양의 몸과 마음에 관한 이분법은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를 거쳐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실로 오랫동안 그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일부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인간 정신 활동이란 결국 뇌의 물질적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정신 혹은 마음은 자체로 고유한 것이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주체라고 주장한다.      

그 주류적 세계관에 대해 니체는 예의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몸이 유기적 생명체라는 점에서 그의 논의는 시작한다. 그 유기성은 끊임없이 반응하고 싸우며 변형되는데, 단순히 자기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한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뭔가를 생성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다. 몸을 정신 이상으로 주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몸은 능동적으로 욕망의 생성과 발현의 주체가 되고, 실천적 행위를 이끌어내니 그를 통해 새로운 인간형이 탄생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니체에게 몸이란 살아있음의 존재론적 기반이 되고, 그 위에서 느끼고, 의욕하고, 발현하고, 행위 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몸은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마음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다. 양자는 치열하게 관계를 맺는 서로 독립된 존재들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몸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존재하며 사는 것이다. 즉 누군가가 스스로 살아있음을 파악하려면 정신으로부터가 아니고 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스스로 물어보자. 당신은 살아 있음을 느끼거나 인식할 때 몸을 통해 하는지 아니면 마음이나 머리를 통해서 하는지? 나는 몸으로 한다. 태어남도 그렇고, 아픔도 그렇고 슬픔도 그렇고 죽음도 몸을 통해서 인식한다. 나는 서양의 주류 세계관이 하는 것처럼 몸이 마음이나 정신에 비해 저열하고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나와 달리 생각한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힌두교나 불교 그리고 유교의 대부분이 그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그러한 종교를 주로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도덕이나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권리를 가진 사제들의 권력 만들기 차원에서 이루어진 세계관이어서 이 사회의 주류 세계관이어서 그렇다. 그들은 정신이나 영혼을 지닌 자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몸으로 노동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물질을 바치고 영혼의 구원을 받음으로써 은혜와 자비를 받는 것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사육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동서양 모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나’ 안에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불변적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사고가 주류를 차지했다. 가령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 한다.’의 명제는 자아와 같은 ‘생각하는 나’가 어떤 실체로 존재한다는 가설을 포함한다. 힌두교 우빠니샤드(Upanishad)에서 말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또한 불멸의 궁극이 있고, 그것은 몸이 아니고 영혼임을 설파한다. 이에 대해 니체는 그런 불변의 주체는 없음을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이 끝없는 변화의 대상일 뿐이라고 본다. 그의 중심 개념인 힘에의 의지를 주관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불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로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더욱 더 강해지기 위해 그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자기 극복의 주체이다. ㅇ여기에서 몸은 정신과 분리될 수 없고 그 안에서 여러 힘들이 모여 서로 즐기면서 관계를 맺어 힘의 의지를 발산시킨다. 그 힘들이 놀이 한 결과가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니 몸을 경멸하는 자들은 자신을 넘어서 뭔가를 창조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배후에 몸이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 기독교, 데카르트에 대한 강한 부인이다. 정신이 몸에 의해 조정되고 그 안에 거주한다는 생각은 인도의 요가와 같은 맥락이다. 니체가 춤을 큰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몸에 대한 중시 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유연한 몸에서 더 지성적이고 예술적인 것이 나오는 것으로 봤다.     


벌써 20년 정도가 흘렀으니 2002년 축구 월드컵 때의 일이다. 한국 국가 대표 감독으로 온 히딩크 감독은 기술 훈련은 별로 하지 않고 오로지 체력 훈련만 시키는 모습이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많은 축구 애호가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반발했지만, 결과적으로 히딩크 감독이 옳았다. 난, 공부를 하라고 학생들을 독려하는 게 주요 일인 대학교 선생이다. 공부에 대해 학생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공부란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몸으로 한다, 이다.’ 몇 시간이고 책상에 붙어 있는 습관을 들여야 하고, 핸드폰을 열지 않아야 하며, 눈을 떼지 말고 손으로 쓰고 입으로 외워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강권한다. 그런데  하지 못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그 동안 그런 몸의 습관을 만들지 못해서 그렇다.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귀찮아서 자꾸 보채는 아이에게 텔레비전을 틀어주거나 핸드폰을 쥐어 준 경우도 있었을 거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뭔가의 이유가 많았을 것이다. 그것은 의지 박약이긴 하지만 ‘정신일도하사불성’ 한다고 해서 풀릴 문제는 아니다.   

   

몸과 관련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몸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인간 본능에 관한 것을 경멸하는 현상이다. 특히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많이 발견되는 이 현상은 자칫 잘못하면 한 개인을 파멸시키기까지 한다. 최근 어떤 기독교인이 몽정을 하는 어린 아들이 정신이 썩어 악귀에 홀렸다고 성기를 묶고 몽둥이로 팼다고 하는 기사를 봤다. 왜 금욕이라고 하는 것을 해야 하고, 그 금욕은 왜 몸에 일어나는 본능을 억제하는 것으로 연결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힌두교에서 세상을 버리고 떠난 기세자(棄世者)들은 몇 년 간 눕지 않고 수도를 하거나, 성기를 괴롭혀 불구로 만들거나, 앉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도 왜 불와정진(不臥精進)이나 묵언정진(默言精進)을 최고의 수행으로 간주하지 않는가? 모두 마음 혹은 영혼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몸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같은 이치에서 나온 문화다. 철저하게 몸을 저급한 것으로 보면서 학대함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사고다.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나는 그들이 새로 배우고 새로 가르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몸에 작별을 고하고 침묵하라고 말할 뿐이다. ... 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형제여,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이 자기다. 그것은 그대의 몸속에 살고 있고, 그것은 바로 그대의 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손에 잡히는 것이 세계다.

손에 잡히지 않는 건

고(苦)로 가는 욕(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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