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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8.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29.

28. 노동

몇 년 전, 노동절 집회에 나가서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두 장의 플래카드와 깃발이 함께 나부끼는 걸 봤다. 하나는 ‘노동이 아름다운 사회’였고, 다른 하나는 ‘노동해방’이었다. 느낌상으로는 무슨 말인 줄 알겠는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모순 비슷하다고 느꼈다. 노동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는 노동이 왜 해방되어야 하는가? 노동이 해방된다면, 그건 노동이 아름답지 못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이 천대 받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금욕을 지고지선으로 여기는 기독교에서는 그 욕망을 억제하는 차원에서 노동을 장려했고, 서구 사회가 노동을 찬양하는 건 이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니체는 노동이란 인간의 고양을 저지하고 억제하는 것이라고 봤다. 노동은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힘을 포기하게 하고 고작 하는 게 타자의 가치를 창출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에 대해 그렇다. 그래서 국가는 노동을 존엄한 것이라는 생각을 널리 퍼트린다. 열심히 노동해서 인간 본능을 억제시키고, 공동체의 부를 창출하라는 것이 숨은 맥락이다. 결국 거기에서 자본주의가 싹텄다. 그래서 니체는 자본에 눈이 먼 자를 원숭이라고 비하했다. 그러니 노동을 하지 말고, 전쟁 즉 싸우라고 했다. 노동을 강제하는 국가라는 우상에 대해 전쟁하라는 것이다. 물론 총 들고 국가와의 전쟁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국가라는 체제를 허물어뜨려 노동 대신 자신의 가치 창출을 위해 놀이하는 인간이 되도록 매진하라는 의미다. 그러니 이를 두고 니체를 노동 반대론자라고 하는 것은 맞지만, 전쟁 옹호론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비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 본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을 장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니체 말대로 놀이를 하는 인간이어야지 어떻게 노동하는 인간이 된단 말인가? 결국, 우리가 궁극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노동을 하되, 노동에 예속되지 않고 그로부터 해방되어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사회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면, 굳이 지금 같이 미래를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동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 잘 살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하면서 그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극복을 외치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더 가난한 사회, 그래서 노동에 그렇게까지 얽매이지 않는 사회, 그래서 생산량이 줄고, 그 시간에 놀고 즐기고 같이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그랬다. 먹고 사는 것이 지금하고 비교해보면 턱도 없이 부족하고, 가난했지만, 이렇게 많이 일 하면서 살지는 않았다. 지금은, 물론 사회적 지위가 높고 충분히 먹고 살만한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노동 과잉의 세계에서 허덕인다. 택배 노동자와 같은 일용직 노동자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있다. 그렇게 노동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들이 노동해서 만들어낸 산물로 사회는 부가 넘쳐흐르지만, 적어도 일용직 노동자는 과거 고대 시대의 노예보다 더 혹독하고 많은 노동에 시달린다고 하는 게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니체는 가난한 이들에게 어느 길을 갈 것이냐고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독립적이라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자기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라는 걸 인정하다면, 돈을 많이 벌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면서,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비참하게 여기는 것은 모순이다. 돈 많은 노예 상태를 치욕으로 경험하느냐 상대적으로 돈이 없어 빈곤하게 살지만 더 인간답게 사는 삶을 경험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의 문제다. 외부의 문제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니체는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짖는 ‘노동해방’을 선동이라 보았다. 그런 다수가 혁명으로 만든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결코 노동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니체는 그것은 종교적 차원에서의 ‘구원’에 필적하는 사회주의 버전의 ‘구원’이라고 보았다. 인간 개인이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규율과 강제를 통해 이루어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정치란 어떤 이념, 규율, 조직 등이 강해서 그것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인민을 추동해나가는 것이 아니다. 개체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제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마오나 스탈린이 제 아무리 그 나라에 기여를 많이 했다 해도 결국에는 그들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 그들이 만들어놓은 체계는 다 뜯어 고쳐야 했다. 니체가 도처에서 이웃 사랑에 앞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것은 개체를 강제하는 체제 아닌 개체 그 자신이 바로 역사를 추동하는 유일한 운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기존의 가치와 명령에 복종해 편안한 삶을 구하려는 노예의 의지와 스스로 명령에 따라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인의 의지가 공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실존 인간으로 사는 주체는 당연히 후자에 의한 것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로 의인화 한 예언자는 신에 대한 믿음도, 찬란한 과학기술 문명도 불안·공포·절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예언한다. 오로지 힘이 있는 개인뿐이다.      


니체의 철학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사는 지금의 노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국민소득 3만 달러에 달하는 시대다. 노동자 사이에 부유한 노동자와 가난한 노동자가 나뉘어 있다. 연봉 5천~1억 사이의 노동자들과 연봉 2천~4천인 노동자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노동자’라 부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노동’이라는 행위가 존중을 받아야 한다느니, 해방이 되어야 한다는 건 이미 모순이 되어버렸다. 결국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는 가난한 자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존엄의 대상으로서의 노동이 아니고 더 좋고 더 안정된 직장을 유지하고 더 안락한 삶을 미래에 누리고자 수단으로서 노동을 대하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자본가들과 궁극적으로 동일한 차원으로 둘 다 자본주의 맘몬 숭배의 노예일 뿐이다. 이러한 행위는 니체의 철학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노동이 아름다운, 노동 해방의 사회를 가져오는 태도가 되지 못한다. 노동자들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가들이나 고용주를 압박해 한 푼이라도 더 돈의 이익을 더 얻어 보고자, 특근에 특근을 마다하지 않는 노조 간부가 이끄는 노동자나 모두 노동의 노예임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노예들이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 자신들의 힘을 키워 승리하려 하지는 못하고 강한 자들의 힘을 빼앗아 내 승리하려 한다고, 마찬가지로 지배자들도 자신이 지배하는 노예의 힘을 빼 순종적인 인간으로 길들이려 한다고, 즉 둘 다 노동의 노예적 인간이라고 쓴 소리를 했다. 어쩌면 150년 이전에 했던 말이 오늘날 이렇게 유효한지, 전율이 인다.      


"노예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현대의 노동자보다 더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 노예 노동은 ‘노동자’의 노동에 비할 때 얼마 안 되는 노동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인정해야만 할 일이다. ‘인간 존엄’의 가치 아래에서 사람들은 항의한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동등하게 도지 못함, 공개적으로 저급하게 평가됨을 가장 지독한 숙명으로 느끼는 그 경애하는 허영심인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57. 

꿈꾸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답지만, 흔들리는 건

그것이 꿈이자 욕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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