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위선
60이 넘은 내 세대의 입장에서는 불꽃같은 칠팔십년대가 가면서 역사의 한 단락이 마무리 되었다. 그 시대가 가고 난 후 절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에 균열이 왔고, 소위 니체가 말하는 원(圓) 같은 혹은 사발통문 같은 중심 세력이 따로 없는 포스트 시대가 왔다. 한 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시대정신이었다. 사람들은 그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몸에 불을 붙였고,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고, 물고문에 죽기도 하고 몽둥이에 맞아 죽기도 했다. 광주에서는 그들이 낸 세금으로 키워진 군인이 그들의 낸 세금으로 산 총칼로 시민을 무려 500명 가까이 학살을 했다. 그리고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면서 당시 악의 편에 섰던 자들이, 지금도 민주화에 단 한 번도 함께 하지 않은 그들이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며 적폐 청산에 버티기로 일관하는 자들이 그 역사를 거스르며 새 시대를 연 사람들을 몰아세운다. 악마들은 지난 40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어 온 그들을 위선자로 만들려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 ‘민주화’와 ‘광주’는 세속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과 충돌하는가? 그들이 세속적으로 살면 위선인가? 그들은 어디까지 도덕적이고 어디까지 개혁적이며 어디까지 희생적이어야 하는가? 악마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여전히 전두환의 후예로서 룸싸롱에 가는 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위선인가? 악의 편에 선 사람들은 악을 행해도 괜찮고, 선의 편에 선 사람들은 악을 행하면 안 되는 논리가 뭔가? 그것이 그들이 규정한 질서를 따르는 결과인가?
니체에게서 위선의 문제는 기독교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기독교가 왜곡된 사제(司祭) 권력을 통해 실재하는 문제를 감추는 행위를 저질렀는데, 그것을 위선이라고 보았다. 강자를 약화시켜 평균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위선의 도덕이고 노예의 도덕이라는 것이다. 니체에게 진리는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하나의 생명으로 주변 환경과 반응하며 생성되는 귀납적 존재다. 이런 차원에서 니체는 인간의 지성이나 어떤 표상에 주목한다. 다른 힘 센 짐승과 달리 인간은 힘이 약하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어떤 약속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를 위장하는 다양한 회피 메커니즘이 생겨났다고 본다. 이 때문에 약한 인간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전쟁을 회피하는 평화조약을 필요로 하고, 그러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자신의 세계에서 사라지게 한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집단이 공동으로 생존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정치가 계발되고 그 차원에서 다양한 거짓 즉 위선들이 고안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위선이라는 것이다. 철저히 실용적 차원이다.
니체는 위선의 출발을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찾는다. 강자가 약자를 약탈할 때 강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지나 약자는 강자에게 당했다는 원한을 가진다. 하지만 약자는 살아남기 위해 도덕적으로 무장해 자신이 선한 존재로 판단되도록 위장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니체는 도덕적으로 위선을 떠는 약자를 악(惡)으로 보았다. 그는 실제 존재하는 격차를 애써 감추려 한 그 위선을 인간이 강해질 수 없는 문제의 출발이라고 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민주화’와 ‘광주’로 표상되는 혹은 ‘노동자’와 ‘통일’로 표상되는 진보 인사들의 처절한 희생을 니체는 위선으로 본 것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그 강함과 약함의 격차를 제도적으로 없애버리는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위선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니체의 논리에 따르면 ‘민주화’와 ‘광주’는 약한 존재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보완해준 것이 일종의 신성성(神聖性)이다. 그 고도의 도덕적 가치를 니체는 위선으로 본 것이다. 그 ‘위선’의 힘을 부여 받으면서 그들은 악에 대한 처벌과 보복의 힘을 잃었다. 바로 그 위선의 역사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이름 안에서 그 악의 무리들이 준동하며 선의 존재를 능멸하고 그것도 부족해 역사를 다시 원상회복시키려 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김대중이 전두환을 사면하여 그 악의 씨를 키운 것이나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을 능멸한 윤석열 검찰총장을 절차와 법에 따라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것은 모두 그 허울 좋은 민주주의라는 도덕성 때문에 그렇다. 용서할 수 없는, 니체의 말대로 처절하게 보복하는 힘의 정치, 강자이자 선인 존재가 약자이자 악의 존재를 가차 없이 처단하는 힘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다시 악에게 당하고, 또 다시 악에게 당하는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다.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개념과 일치한다. 그가 국가를 새로운 우상으로 상정하면서 절대로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치다.
니체는 보편적인 도덕을 거부했다. 그 안에서 그가 위선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보편적인 도덕 위에 기초하며 산다. 그렇다면,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그 위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디까지 그 ‘위선’을 거부할 것인가? 이것이 니체를 따르는 자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어려운 점이다. 나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니체가 주장하는 관점주의적 태도를 따른다. 이른바 상대주의적 해석 방법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것, 각자 자기의 눈에 맞게 도출된 의견과 해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니체의 생각을 받아들인 뒤 선과 악을 가르는 내 자신의 관점을 새로운 나의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다. 그 기준은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체계가 나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일단 민주주의 체제를 인정한다. 하지만, 악의 뿌리를 뽑아내고 처벌하는 것, 그에 대해 보복하는 것이 관용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화와 ‘광주’를 능멸하는 자는 끝까지 찾아내 용서하지 않는 것이 니체를 따르는 길이라고 난, 믿는다. 그런 점에서 전두환, 윤석열 같은 혹은 영화 《밀양》에 나오는 그 강간범 같은 사회의 악에 대한 관용은 결단코 반대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내일과 모레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철학자는 언제나 그 자신이 사는 오늘과 모순된 상태에 있어왔고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나는 더욱 생각하게 된다."
《선악의 저편》 212
죽여야 하는 것은 죽여야
강한 것이 강하게 되고
그것이 자연의 이치고, 인간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