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오와 이야기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1989 년 영화, 꿈의 구장 (Field of Dreams) 은 어찌 보면 좀 황당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옥수수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주인공 레이 킨셀라는 어느 저녁 옥수수밭을 걷다가 갑자기 환청을 듣는다. "그것을 지으면, 그가 올 것이다. (If you build it, he will come)" '그것' 이 무엇인지, '그' 가 누구인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멀쩡한 옥수수밭 일부를 갈아 엎어 야구장을 짓고 나자, 옛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야구선수였던 맨발의 조 잭슨 (Shoeless Joe Jackson) - 혹은 그의 영혼 - 이 야구장에 나타난다. 레이 킨셀라와 한동안 공을 주고 받은 조 잭슨은 야구장을 가로질러 옥수수밭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묻는다.
"여기가 천국인가요?"
"아뇨, 여기는 아이오와에요."
얼마 후, 조 잭슨을 비록하여 블랙삭스 스캔들이라는 1919 년 월드시리즈의 승부조작에 관여되어 야구계에서 추방당한 여덟 명의 선수들 - 혹은 그들의 영혼 - 이 나타나 레이 킨셀라가 지은 야구장에서 야구를 하기 시작한다. 야구를 모티브로 가족과 화해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 꿈의 구장은 평도 괜찮았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마도 짐작하셨겠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옥수수밭이 바로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이다. 아이오와 북동부에 위치한 다이어스빌 (Dyersville, Iowa) 에 가면 실제로 꿈의 구장이 있다.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든 옥수수밭 한가운데의 야구장을 그대로 두고 기념품 가게를 열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 보려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의외로 매년 5-6 만 명 정도는 이 야구장을 찾는다고 한다.
사실 꿈의 구장 촬영지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모르다가 어느해 이른 가을에 위스컨신을 다녀오다가 길에서 꿈의 구장이라고 쓰여 있는 도로 표지판을 보았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이 동네에 언제 다시 오겠나 싶어서 급히 꿈의 구장 촬영지로 차를 몰았다. 슬슬 어두워질 무렵이라 기념품 가게는 문을 닫았고 야구장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야구장 전경을 사진으로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본 후에 오면 좀 더 느낌이 살아날까? 역시 그 때 한 번 들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 이후로 꿈의 구장 근처를 갈 일은 생기지 않았다.
굳이 꿈의 구장 촬영지를 다시 찾지 않은 이유에는 내가 그리 대단한 야구팬이 아니라는 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축구라면 자다가도 귀가 솔깃해 지는데, 아이오와에서 1 년을 지내고 나서 두번째 해에 한국학생들 위주로 구성된 축구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찌저찌 해서 나도 팀에 끼게 되었다. 야구나 미식축구, 농구 같은 스포츠들보다는 인기가 떨어지지만 사실 동네마다 있는 축구 클럽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미국 축구의 기반이나 잠재력은 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았던 아이오와시티만 해도 서너 살 된 꼬마들부터 고등학생까지 연령대별로 구분해 계속해서 공을 찰 수 있는 클럽이 세 곳이나 있다. 성인의 경우에도 앞서 언급한 세 개의 클럽 중 하나인 키커스클럽에서 주최하는 아마추어 성인 리그가 봄가을로 열리고, 대학교에서 교내 축구대회도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누구나 꾸준히 공을 찰 수 있다.
키커스클럽에서 주최하는 성인 아마추어 리그에 내가 처음 참가하던 그 해 가을, 축구장 위치를 지도에서만 확인하고 별 생각 없이 운전해서 가는데 시내를 벗어나 강 옆을 지나더니 갑자기 옥수수밭과 콩밭 사이로 길이 나있는 것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어,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조금 헤매다가 즐비하게 서있는 옥수수들을 뒤로 하며 작은 언덕을 넘고 나니 눈 앞에 넓은 잔디구장 십수 개가 펼쳐졌다. 순간 황당하다는 느낌과 함께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거, 완전히 꿈의 구장이잖아! 그 이후로 키커스 필드를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아직도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축구장 입구로 들어설 때면 영화 꿈의 구장과 함께 이 장소의 강렬했던 첫인상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내 눈에는 황당하게 느껴졌지만 이런 축구장이나 야구장의 존재가 여기서는 특이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인구가 수백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동네 공원에 가면 시에서 관리하는 야구장 한 면, 축구장 한 면 (관리가 엄청나게 잘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천연잔디구장이다) 정도는 어김없이 있다. 아이오와에는 수많은 농장들이 있는데, 농장 하나의 평균 면적이 333 에이커니까 134만 제곱미터, 평으로 계산하면 40만 평이 넘는다. 농장 하나가 서울의 웬만한 행정동 하나 정도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 넓은 농장 한 구석에 야구장이나 축구장 하나 만드는 것 정도야 농장 주인이 그걸 좋아하고 그 구장을 이용할 사람만 있다면 무어 그리 대수겠는가. 한국사람 입장에서야 그저 넓은 땅덩어리가 부러울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