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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 혜은 Jan 01. 2022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돈

아빠를 살린 2억 원, 아빠를 죽인 10억 원

 곧 출간된 제 책의 일부를 공개합니다.


 2019년 초고를 눈썹이 휘날리게 써 내려갔던 새벽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이른 새벽 나를 흔들어 깨우는 글감을 받아 적으며 울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글쓰기 덕분에,  10년 전 그리고 20년 전 모른 척 덮어 두었던 아픔을 꺼내 어루만질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한 해 동안 집약적으로 일어났던 부동산 거래에 대한 개인적인 목적의 기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투자를 위해서 명심해야 할 사항,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다짐 등에 대한 기록이었지요.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제 기억은 이와 연결된 제 삶의 고리들을 하나씩 들춰내고 있었습니다.  

 10년 전(2009년) 엄마의 죽음과 상속받았던 ‘유산’에 대한 기억, 2002년 아빠의 죽음과 2년의 투병에 얽힌 ‘돈’에 대한 이야기까지…

 

 오늘 공개하는 글은 제 책의 1부 첫 시작입니다. 과거 저의 돈에 대한 트라우마에 대한 내용입니다. 4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글들 중 일부를 추려 놓아 봅니다.


 돈과 삶은 함께 흘러갑니다.

돈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인생의 희노애락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이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돈 덕분에 행복하냐, 돈 때문에 불행해지느냐? 이 또한 내가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앞부분 생략)



아빠를 살린 2억 원, 아빠를 죽인 10억 원


 아빠는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혈기 왕성하던 우리 아빠는 60대 초반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몸매도 패션 센스도 탁월하신 분이셨다. 나는 멋쟁이 아빠가 좋았다. 아빠가 옆에 있으면 든든했다. 아빠와 함께 다니면 어디서든 주목을 받았고, 늘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이런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의 진단과 함께 혈기왕성하던 아빠는 빛을 잃어갔다. 강했던 아빠는 서서히 시들어갔고 투병 2년 만에 돌아가셨다.

'무엇이 아빠를 병들게 했을까?'

식구들은 아빠 병의 원인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이 일은 우리가족 누구에게라도 반복될 수 있는 일이었다. 원인을 찾아서 반복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사들은 병의 원인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유전은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아빠가 걸린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젊은 사람에게 발병 빈도가 높은 병이지 아빠처럼 60대 이후에 결릴 확률은 몇만 분의 1의 확률이라고 했다.


 대체 원인이 뭐였을까? 시시때때로 토론을 벌이던 가족들은 아빠 병의 원인이 '돈'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심한 억측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믿었으니까)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7년, 아빠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돈을 빌린 사람은 아빠의 절친이었는데 사업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나 보다. 아빠는 아무런 의심 없이 약속어음 한 장만 달랑 받고 친구에게 10억 원(20여 년 전의 10억 원은 지금쯤 얼마의 가치를 지닐까?) 이 넘는 거액을 빌려주었다. 친구는 돈을 받자마자 파산 신청을 하고 미국으로 잠적해 버렸다. 아빠가 병을 얻기 3년 전의 일이었다.

 아빠는 이 사실을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돈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의 병은 깊어졌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 사기를 계획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준비한다. 아빠가 친구에게 돈을 건넨 그 순간, 이미 그 돈은 아빠의 손을 떠난 것이다. 아빠는 그걸 알았어야 했다. 떠나간 버스에 미련을 두지 않았더라면 아빠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건강에 자신이 차고 넘쳤던 아빠는 당시 그 흔한 암 보험은커녕, 의료실비보험조차 들어놓지 않았다. 만 2년이 채 못 되는 투병 기간 동안 병원비로만 2억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수혈도 검사도 모두 '돈'이었다.

 아빠가 무균병동에 있는 동안 돈이 없어서 치료를 중단하고 돌아가는 환자들을 꽤 많이 보았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돈이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돈 걱정 없이 아빠가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사실 아빠가 잃어버린 돈 10억 원이 없어도 우리 집 살림은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 아빠가 병상에 누워 경제 활동을 전혀 못하고 치료비로만 2억 원을 썼을 때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가 느꼈을 심적 부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현실은 그랬다.

 심지어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7년 동안 엄마는 은행 이자 외에 별다른 수입 없이도 잘 버텨냈고, 엄마까지 돌아가신 후 우리 삼 남매에게는 상당한 유산이 남겨졌다. 아빠가 집착했던 돈 '10억 원'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빠는 돈에 대한 근심 때문에 자신의 귀한 목숨을 잃었고, 엄마는 남편을, 우리 삼 남매는 아빠를 잃었다. '돈'이 한 가정의 해체를 부른 것이다.


(중반부 생략)


엄마의 끊임없는 돈 걱정


 엄마는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었다. 호탕한 성격에 친구도 많고,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청하는 유쾌한 분이셨지만, 내면의 걱정과 고민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심지어 없는 걱정까지도 미리 만들어 대책을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엄마의 걱정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혹은 과거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후회 같은 것이었다.

 

 짐작해보면, 엄마의 불안은 아빠의 백혈병 진단과 함께 더욱 커졌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병명, 엄청난 치료비, 남편의 경제활동은 멈추고 가장의 역할이 '올 스톱' 되는 상황이 엄마를 압박했을 것이다. 앞으로 모든 것을 엄마가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난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계획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엄마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엄마의 모든 기준은 아빠가 아프기 전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남편이 살아 있었으면, 애들한테 이 정도는 해주었을 텐데...'

'혜은이 결혼 비용도 필요하고, 장남도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엄마를 괴롭혔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나마 탄탄하게 자리 잡아 잘살고 있는 큰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엄마에게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머릿속은 온통 앞으로 들어갈 돈에 대한 계산뿐이었다. 바뀐 상황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유지했던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한 채 그때 세웠던 계획 그대로 실행하려 했으니 엄마는 답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그렇게 돈 걱정을 하는데도 자식들은 생활비를 한 푼도 보태지 않았다. (무척이나 미안한 부분이다. ) 우리는 엄마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 집 상황이 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 어떻게 될까 봐 불안했던 것은 엄마뿐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만 7년 만에 엄마마저 돌아가셨다.

늘 돈 걱정뿐이었던 엄마의 통장 잔고를 보고 우리 삼 남매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 그렇게 전전긍긍하지 않았도 되었는데....'

엄마는 우리에게 꽤 많은 재산을 남겨주고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돌아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혼자 돈 걱정을 하는 대신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이제부터 너희 살길은 너희가 찾아라."

이 한마디만 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것이다.

앞이 꽉 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길이 보였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오빠는 오빠대로, 또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바뀐 상황에 맞게 대책을 세우고 움직였을 테니까.

 성인이 된 자식의 미래까지 엄마가 책임 질 필요는 없었다. 엄마만 그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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