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흑해연안, 그중에서도 동쪽으로 조지아 국경에 가까운 작은 도시 아르데센이라고 있다. 내가 그 볼 것 없는 작은 도시에 왜 갔냐면 소를 보기 위해서였다. 흑해 연안에서 내륙으로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해발 2천미터가 넘는 아름다운 산맥이 펼쳐지는데 거기서 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흑해 연안 산악지대 Ayder에서 만난 염소떼. 황혼녁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음. 이들은 카지노와 관련없음.
Ayder에서 소를 만나기는 했으나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슬픈 만남이었음.
이 소는 흑해연안이 아닌 Hakkari(터키 이라크 국경도시)에서 만났음. 아담사이즈.
어쨌든 각설하고 그 별볼일 없는 도시에서 빈둥거리며 2박을 하고 30여 시간에 걸쳐 달리는 안탈리아행 버스를 타기로 했다. 해가질 무렵에 버스정류장에 나갔더니 직행버스 한 대가 사람을 빽빽히 태우고 나타났다. 이웃나라인 조지아에서 들어오는 버스인 듯 했다.
나는 버스 운전사 대각선 방향 맨 앞 좌석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터키 아주머니는 자식네를 다녀갈 모양인지 버스가 멈출때마다 대합실로 들어가 먹을 것을 바리바리 사들고 들어왔다. 나는 안탈리아에 가면 저 아줌마가 입은 것 같은 꽃무늬 밑위가 긴(무릎높이에 밑위가 존재) 몸빼를 하나 사입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늘 그렇듯 나는 버스안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길고 긴 서른시간 여행에 말벗이 되어줄 사람은 눈씻고 봐도없었다. 대학의 도시 앙카라를 경유한다면 운좋게 대학생을 만나 얘기를 나눌 수도 있겠으나 방향이 다르다. 터키 남동부 사막 지역에서 지내다 수풀무성한 흑해로 들어왔더니 알레르기가 도져서 자꾸 재채기를 해댔다. 코로나로 난리도 아니던 때라 재채기를 하면 엄청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얼굴이 벌개질때까지 참다가 이러다 귀로 재채기가 터져나올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을때만 재채기를 살짝 했다. 그럴때마다 주변의 터키 아줌마들이 내게 터키말로 지청구를 주었다. 빈자리가 생길때마다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 둘씩 다른 좌석으로 이동하고 이윽고 나는 버스안의 섬처럼 홀로 앉아있게 되었다. 조금 서러웠다.
버스안에서 소문이 다 났을 것이다. 저 외국인을 조심해야한다고. 전염병 시국에 외국인이란 것들은 다 바이러스 덩어리로 치부된다. 그런 와중에 버스가 출발한지 대여섯 시간이나 지났을까... 이제 정말 야밤이 되었으니 자기전에 화장실에나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은 휴게소에서였다. 내려서 화장실에 다녀온 후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걸걸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What a nice night! Isn't it?
봉다리를 여러 개 들고있는 예순 반백의 여인이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내게 말을 걸었다. 흠... 부정의문문이다. 이럴 경우 나는 부정으로 대답해야하나, 긍정으로 대답해야하나. 학력고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헷깔리는 부분이다. 나는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
Yes, it is.
라고 대답했다. 상대방이 아름다운 밤이라는데 여간 추하지 않고서야 딴지걸 이유가 없다.그건 그렇고 이 영어가 유창한 아주머니는 못보던 아주머니인데 어디서 튀어 나오셨담? 행색은 추레하나 다른 아주머니들처럼 꽃무늬 밑위 긴 몸빼를 입지 않고 청바지를 입으셨다. 일반 담배보다 긴 디럭스 줄담배를 평생 태우셨는지 목소리가 우리 친정 아버지 못지 않게 걸걸하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이 독일말도 좀 하는데다 이태리말까지 한단다. 영어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서바이벌 영어가 아닌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영어다. 어학에 관심이 많아 제2외국어, 제3외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단다. 영국에서 공부까지한 걸 보면 배운 여자다. 이런 흔치 않은 인재를 버스안에서 만나다니!
이름이 헤다라고 했다. 목적지는 안탈리아.
나는 화장실을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취침에 들 예정이었으니 헤다의 등장으로 깜놀 잠이 확 달아났다. 그녀에게서 디럭스 담배 한 대를 얻어 피웠는데 손끝 발끝이 찌릿해져오며 어질어질했다. 오랜만에 피워본 담배는 무척이나 독해서 빈속을 뒤집어 놓았다.
헤다는 조지아에 있는 카지노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왕복 60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흠....내가 만나본 터키 아줌마들은, 그러니까 독일에서 만난 터키 아줌마, 터키에서 만난 터키 아줌마들 통틀어 주로 가족들을 위해 인자한 얼굴을 하고 교슬레메(터키식 치즈 팬케잌)를 만드는 분들이시다. 나는 여적지 예순이 넘은 터키출신 여자 분이 혼자서 카지노엘 가겠다고 국경을 넘어 왕복 60시간이상을 여행하는 경우를 들어보지 못했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는 나는 이 밤, 헤다와 대화로 회포를 좀 풀었으면 하고 몸짓으로 말했다. 그러나 헤다는 어제도 거의 밤을 세우다시피했으므로 계속 자야한다며 버스 뒷좌석으로 사라졌다.
매력적인 여성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정차한 휴게소에서 나는 누런 콩죽을 배식받기 위해 줄을 섰다. 죽이 생긴 건 저래도 뜨끈뜨끈하니 잠을 설친 아침에 속을 채우는 데는 그만이다.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미 콩죽을 배식받은 헤다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Eunji, I am here!
아, 이 낯선 터키땅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다니, 나는 그에게로 가서 바이러스가 아닌 꽃이 되어야 한다. 나는 콩죽과 빵 한 조각을 받아들고 헤다에게로 갔다.
Did you earn lots of money in Casino?
No, not at all.
카지노에 가본 적이 없는 내가 각종 매체를 통해 얻게된 카지노에 대한 지식을 통틀어 보자면 사람들은 돈가방(재벌, 연예인)이나 집문서, 땅문서(영화 귀주이야기)를 들고 카지노를 찾는다. 카지노에 머무는 동안 화려한 호텔에서 숙박을 한다.(영화 레인맨) 카지노에서 가진 돈을 다 날리고 빈털털이가 되거나, 상황이 안좋을 시 신장이 하나 없는 상태로 귀향한다.(추적 60분)
나의 예상과는 빚나가게 헤다는 매달 조금씩 조금씩 용돈을 모아 실비로 카지노를 찾는다. 늘 60시간 왕복 버스를 타는 건 아니다. 때때로 실비 기획 비행기 티켓이 나오면 비행기를 타고 조지아를 찾기도 한다. 작년엔 버스가격보다 몇천 원 더 얹은 가격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잠은 카지노 근처 4인실 호스텔에서 잔다. 밥을 먹기 위하여 따로 식당엘 가지 않는다. 음식은 카지노에서 공짜로 해결한다.(희안하게도 카지노에서 공짜로 밥을 준다고 함. 누구에게나 다 공짜는 아니고 웨이터와 안면이 좀 있어야 하나 봄.) 그렇게 2박3일정도 카지노에서 가지고 간 소정의 돈을 잃으며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옴.
이렇게 적은 돈으로 4박5일(그중 2박은 버스안에서 해결) 해외 카지노 여행이 가능하다니! 이건 기적이닷! 내가 헤다의 실비 도박여행에 관심을 보이자 혹시 관심있으면 다음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엄마가 술 담배 도박 하지 말랬다고 웃어 넘겼다. 사실 나는 겁이 많아 도박과 마약을 하면 죽는줄 아는 사람이다. 근처에 얼씬대기만 해도 3대가 멸하는줄 교육받고 자라왔으므로 웬만해서는 그런걸 할 엄두를 못낸다.
헤다와는 안탈리아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며 웟쯔앱을 공유했다. 나는 정류장에서 직행버스를 갈아타고 지데(Side)로 향했다. 안탈리아에 오게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안탈리아로 돌아와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한 비어 가르텐이라는 여행자 숙소에 짐을 풀었다. 맥주를 마셔볼 양으로 비어 가르텐을 숙소로 정했는데 이곳에서는 어쩐 일인지 비어를 팔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슈퍼마켓에서 비어를 사와 혼자 마셨다. 안탈리아에 오니 나도 아는 사람이 있다는 왠지 모를 든든함이 있었다.
비어가르텐의 전경. 옆집에 라이브 카페가 있어서 공짜로 라이브를 들을 수 있음.
헤다에게 연락을 했다. 우리는 안탈리아 시내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헤다는 노모와 5년 전에 이혼한 남편을 대동하고 스타벅스에 나타났다. 노모가 병원에 가는 날이라 자동차가 필요해서 전 남편을 대동하고 나왔다고 했다. 터키에서는 남자가 딸과 아내를 차로 모셔다주고 모셔오는 일을 하는 것이보편적인 일이라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전 부인과 전 장모에게도 해당되는 일인줄은 몰랐다. 그녀는전 남편 집에 테라스 공사가 끝나서 풍광이 좋으니 그리로 가서 그릴을 하라고 했다.
전남편 집에?현남편 집에 가는 것도 껄끄러운데 전남편 집에? 내가 왜?
고기를 대접하고 싶어서란다. 때마침 앙카라에서 대학엘 다니는 딸도 내일 오는데 그릴을 하면 안성맞춤이겠다고. 헤다는 일이 있어서 빠질테니 느이들끼리 모여서 그릴을 하라고. 전남편의 부인이 손님을 좋아하고 사람북적이는 걸 좋아해서 그러니 부디 사양말고 가란다. 사람좋아보이는 전남편도 연신 웰컴웰컴 한다.
이거 뭐... 얼떨결에... 예쓰.
이리하여 안탈리아의 평범한 가정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는데. 스타벅스에서 10분 대면한 전남편 외에 낯모르는 분들만 오신단다. 출산후 약간의 안면기억상실증이 생긴 나는 그날 늦은 오후가 되자 10분 대면했던 전남편의 얼굴마저도 잊어버렸다. 초대받은 사람을 나열하자면 전남편을 위시하여 5년전에 전남편과 결혼한 전남편의 현 부인(간호사 출신의 조지아 사람), 앙카라 대학에서 물고기에 대해 공부를 하는 친딸(노르웨이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가서 물고기를 계속 연구할 예정이라 함), 친딸의 앙카라 대학 과친구. 모두 모르는 사람이다. 낯을 가려서 웬만한 파티건 잔치건 가기를 꺼리는 내가 이국만리 터키에서 낯모르는 사람한테 초대를 받았다. 실로... 할 말이 없으나. 터키인의 손님환대는 알아줘야한다.
글이 긴 관계로 이후에 있었던 일들은 사진으로 대체한다. 아쉽게도 사진을 찾아보니 정작 주인공 헤다의 사진이 없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사진을 알뜰히 찍는 사람도 아니고. 헤다와는 아직도 연락을 한다. 터키는 내가 자주 가는 여행지중 하나인데 이제 헤다가 있어서 더욱 친근한 곳이 되었다. 다음 헤다의 카지노 가는 길에 동행하게될 일이 있을까? 한때 잠깐 그렇게 해볼까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결국은 안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뻘쭘해서다. 나는 낯을 가려웬만한 사람과 만나면 대체로 뻘쭘하다. 그래서 남과 여행을 못다닌다. 뻘쭘하면 불편하니까.
하나뿐인 동양인 나, 오른쪽 방향으로 과 친구, 딸래미, 헤다 전남편의 현부인, 전남편. 와인병은 내가 사들고간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