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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Jul 24. 2020

나의 시어머니, 안쓰러운 철의 여인


4단 알루미늄 사다리.


이것은 내가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우리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선물을 준 자의 변을 들어보자면, 며느리가 키가 작아서, 그 작은 키로 주방이나 장롱에서 물건을 내리는데 애로사항이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 이후에 받았던 옷 선물들도 거의 다 XS 사이즈의 옷들이었다. 아무리 독일 사이즈가 한국 사이즈보다 크게 나온다지만 나에게 XS 사이즈는 작다. 시어머니는 나의 첫인상을, 아니 아직도 나를 동양에서 온 작은 여자로 보신다.


사실 나는 그렇게 작은 사람이 아니다. 161센티미터에 56킬로그램, 딱 벌어진 어깨와 근육질 체격으로 우리 시대 한국인 여성의 평균 체격보다 약간 크다고 할 수가 있다. 심지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살을 빼기 위해 에어로빅 학원엘 갔을 때, 원장님으로부터 체격이 좋고 목소리가 우렁차니 에어로빅 강사를 해보라고 제의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 길로 에어로빅 강사 교육을 받고 강사가 되어 대학시절 에어로빅 새벽타임 강사로 뛴 적도 있다. 이렇게 늘 등치가 좋다는 말을 듣고 자란 내가 독일에 오는 순간부터 갑자기 스몰 사이즈의 여자가 되다 보니 약간 얼떨떨했다.


그럼 나의 시어머니 잉그리드는 어떠한가. 외견상으로 176센티미터에 몸무게는 75킬로그램 (내 어림짐작) 정도 되니 독일 여자 치고도 큰 편에 속한다. 성격까지 괄괄해서 나이 70이 훌쩍 넘었지만 누구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다. 옷도 젊은 사람처럼 입고 가방은 부인용 명품백이 아닌 젊은이들에게 각광받는 재활용의 대명사 프라이탁 가방을 들고 다닌다.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25살 어린 나보다 훨씬 더 에너지 넘치게 산다. 오지랖이 넓어 끙끙거리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을 보면 도움을 청하든 안 청하든 간에 가서 한 마디 거들어 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70이 넘었음에도 노인네라는 말이 이렇게 안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므로 같이 살게 되면 전적으로 저 사람한테 의지하고 싶어 지는 사람, 무엇을 결정하더라도 나보다 나은 결정을 할 사람이니 늘 그의 의견을 따르면 적어도 잘못되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 나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그것을 해결해주거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을 대신 혼내줄 것 같은 사람. 옛 어른들의 말을 빌리자면 딱 장군감이다. 나는 살아가면서 이런 류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처음 잉그리드를 만났을 때 당황했었다.


사람의 본성은 상대적인 동시에 끊임없이 편한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이더라도 상대적으로 나보다 강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 착 달라붙어 어떻게든 편하게 빌어먹고 싶은 기분이 강하게 든다. 대학을 졸업하고부터는 친정부모에게도 손 벌리지 않았던 내가 잉그리드를 만나니 의지하고 싶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나는 갓 독일에 온 키 작은 외국인이 아니었던가. 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내가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건 잉그리드가 그런 여지를 내게 줬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은행계좌를 만들 때부터 일상의 사소한 일까지, 심지어 컴퓨터가 고장이 나도 구글로 찾아볼 생각은 접어두고 일단 잉그리드한테 전화부터 했다. 잉그리드 덕분에 내 독일생활의 시작이 한결 쉬웠다.




잉그리드는 삼 남매 중 중간으로 태어났다. 둘째였지만 어렸을 때부터도 부모님들이 일을 하러 나가면 한 살 많은 언니를 제쳐두고 맏딸처럼 남매들 밥을 해서 먹이고 집안 청소를 하고 살았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고 싶었던 대학엘 들어가지 못하고 간호사가 되었다. 2차 대전 후라 대부분 가난하던 시대였다. 열여덟의 나이에 새벽 5시에 일어나 한 포대의 감자를 깎고 날마다 10명의 환자 기저귀를 갈고 몸을 씻기는 고단한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일을 천직으로 받아 들였다.


간호사 주제에 고위 공무원의 둘째 아들과 결혼한다고 결혼식도 못 치르고 그 이후에도 주욱 당신의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 취급을 못 받고 살았다. 레스토랑에서 신랑과 반지 하나 나눠끼는 걸로 결혼식을 대신했단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없는 집안에서 시집온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시댁에 며느리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일말의 노력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잉그리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의사의 딸로 태어나 곱게 커서 공무원에게 시집와 평생 자기 손으로 돈 십원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자가 감히 나를 무시해? 자기보다 열등한 자의 무시는 곧잘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잉그리드는 평생 당신의 시어머니 테레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시하고 살았다.


 결혼하고 서른 즈음에 대학병원의 수간호사가 되어 쉴 틈 없이 일했다. 쉬었던 적은 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 직후 정도가 전부다. 오십 즈음에 생긴 알레르기로 인해 병원 근무가 힘들어지자, 디플롬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대학엘 들어갔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그 어렵다는 독일 대학 학위를 10년 만에 받았다. 환갑에.  그 후 일흔이 넘은 나이까지 계속 일하고 있다.


그녀는 예순셋이었던가 넷이었던가 유방암에 걸린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암에 걸렸다는 것은 물론 수술한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고 있다가 수술 이틀 전엔가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렸다. 마치 엉덩이에 난 종기 떼러 간다는 듯이 가볍게. 우리 집안엔 흔한 암환자 하나 없어 암 걸리면 다 죽는 줄 알고 놀란 가슴 부여잡고 병문안을 갔더니 잉그리드는 수술을 마치고 너무나도 멀쩡하게 앉아있었다. 수술한 부위에서 나오는 진물 받이 플라스틱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그래도 이게 오줌보 차고 다니는 것보담 낫지 않니? 하고 웃으며 농담까지 했다. 병원에서 그걸 허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자복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평상복을 입고 밥을 먹고 있었다. 전혀 암환자 같지가 않았다.


주변인들은 암환자가 무슨 일이냐며 당장 조기퇴직하라고 종용했지만 늙어서 하는 일 없이 놀면 일찍  노망 든다며, 아프기 전까진 일을 할 거라 했다. 


그녀는 프리랜서 고소득자라 우리와 함께 가족 휴가를 가면 여행경비 전액을 지불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크리스마스 때도 부모님 댁이라고 찾아가면 방이 다섯 개나 되는 집에 방 하나 내줄 만도 하거니와 애 데리고 줄줄이 와서 자고 가면 속 시끄럽다고 호텔을 잡아준다. 물론 비용은 잉그리드가 낸다. 매해 아들 며느리의 생일엔 선물로 현금을 이체해주신다. 나는 이체받은 돈을 고스란히 내 생일 몇 주 후 생일을 맞는 친정 아버지께 다시 이체한다.  글을 쓰다보니 내가 잉그리드에게 며느리된 도리도, 효도도 하지 못하고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천성적으로 기가 세지 못하다.


게다가 주로 예쁜 행동을 해서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막내딸로 길러졌다 보니 남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하는 법 자체를 모른다. 친정 엄마는 병으로 자리보전한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를 20년 동안 군소리 없이 봉양했고, 층층시하 시누이들에게도 좋은 소리만 듣고 살았다. 그걸 보고 배운 내가 우리 친정 엄마보다는 열 배는 기가 센 시어머니한테 무슨 소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얌전한 며느리로 13년을 시부모님 근처에서 살다 어느날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시부모님을 떠나려고 굳이 이사를 강행한 것은 물론 아니다. 딱히 우리가 함부르크를 떠난 이유를 말하라면, 살다 보니 어떻게 그렇게 됐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벌여놨던 사업도 기울어 갔고 당시 우리에겐 어떤 탈출구가 필요했었다. 아마 우리가 편한 시부모 그늘에서 사는 것을 택했다면 함부르크에서 사는 것을 1순위로 두고 직장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는 클 대로 컸고 아이도 학교 들어갈 나이가 얼추 다 되어 할머니 할아버지 손길이 덜 가도 됐었고. 여러 가지 상황들이 가세하여 결국 함부르크를 떠나게 되었다.


함부르크를 떠날 때, 가타부타 맘속의 말을 안 꺼내놓던 철의 여인 잉그리드가 여러 번 안 가면 안 되겠냐고 물어왔다. 떠나는 날에는 어쩌면 잉그리드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치는 것도 보았던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30년을 살았고 독일에서 20년을 살았다. 그중 함부르크에서는 13년 정도를 살았는데 그곳은 내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정다운 친구들이 있는 곳, 미나를 낳고 기른 곳, 그리고 든든한 내 시부모님이 계신 곳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라는 말을 응용하면 며느리 이기는 시어머니 없다가 된다. 나는 살면서 직접적으로 시어머니와 각을 세운 적은 없었지만 살다보니 불만이 하나 둘씩 생겼다. 그러나 늘 각을 세울 필요도 없이 승리는 내가 가졌다. 내가 아무리 키 작고 기가 약한 며느리고 당신이 아무리 기가 세고 괄괄한 시어머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승부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결정났다. 왜냐하면 내게는 당신의 아들과 손주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도 독일 생활 초창기의 내가 아니다. 이리치고 저리 치며 독일에서 20년을 살다 나이 오십에 접어들다 보니 교활한 여우가 다 되었다. 이젠 시부모뿐만 아니라 어딜 가서도 웬만해선 휘둘리지 않는다. 




철의 여인은 늘 밑지는 장사를 하고 산다. 그래서 더 안쓰럽다.


잉그리드와 동갑내기인 기젤라가 있다. 기젤라는 잉그리드와 같은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를 하다가 잉그리드의 남동생인 한스와 결혼을 하였다. 나에게는 시숙모되는 사람이다. 기젤라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잉그리드와 정정 반대의 사람이다. 한없이 부드러운 사람, 뭘 잘 못해서 자꾸만 도와주고 싶은 사람, 일을 일찍 그만두었는데도 불구하고 잉그리드에 비해 빨리 늙었고 여기저기 자꾸 아픈 사람. 늘 기력이 딸려 밥을 한 번 따뜻하게 해서 먹여주고 싶은 할머니.


나는 시댁에서는 내가 주도하여 음식을 만든 적이 거의 없었다. 시댁에 가면, 특히 주방에서 나는 조수로서 감자나 깎고 그릇들을 옮기고 잉그리드가 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뭔가를 잘해서 칭찬을 받고 싶지만 일을 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젤라의 집에 가면 다르다. 나는 기젤라의 집에 갈 때부터 메뉴를 스스로 정하고 먹을 음식을 슈퍼마켓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간다. 그 집 주방에선 내가 요리사가 될 수 있다. 내가 국수를 삶고 고기와 야채를 지지고 있으면 기젤라는 옆에 서서 침이 마르게 내 칭찬을 하며 감자 깎아주랴, 쓰레기 버려주랴, 맥주 한 잔 갖다주랴 하면서 심부름을 자처한다. 그러면 나는 기젤라에게 이것 좀 해달라, 저것 좀 해달라 요청을 한다. 요리가 완성이 되어 다 같이 둘러앉아 먹을 때쯤이면 나는 아주 으쓱해진 기분이 된다. 그렇게 한 상을 차려주고도 다음에 기젤라 집에 가면 내가 얻어먹는 거라곤 삶은 흰 소시지에 절인 양배추가 전부다. 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것을 갖다가 삶거나 포장지만 뜯어서 접시에 올려놓은, 요리라고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걸 얻어먹어도 나는 그 집이 좋다. 잉그리드와 함께 있으면 나는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이 되지만 기젤라와 함께 있으면 관계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니까.


기젤라와 잉그리드 중 누가 좋다 나쁘다 할 순 없지만 속정이 더 가는 사람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기젤라이다. 기젤라보다 내게 더 많은 것을 주고도 잉그리드는 내게 밥상 한 번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기젤라와 잉그리드 중 밑지는 장사를 하는 건 누구일까?


"느그 시오마씨 마이 부랑터라. 할마씨 심기 건드리지 말고 잘 살아라."


부랑타는 경상도 사투리로 성질이 괄괄하고 다혈질이다 라는 뜻으로 나의 친정엄마가 산후조리해주러 와서 시어머니를 만난 뒤 한 말이다. 우리 친정엄마는 내가 괄괄한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하는 것은 아닌지, 외국에서 마음고생을 하거나 무시받고 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많이 했다. 우리 시어머니가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먼 사람을 마음고생시키는 사람은 아니다. 잉그리드는 자기의 그늘로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호의적이라 시집살이는커녕 내가 덕을 많이 보고 살았다. 솔직히 말하면 잉그리드는 무엇이든 척척 알아서 하는 괄괄한 성격 때문에 얼마나 많이 밑지고 사는지 모른다. 며느리한테 변변한 밥상 한 번 못 얻어먹은 사람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당신한테 과연 죽을 날이 올까.


모든 사람이 다 죽겠지만 나는 이 다혈질인 늙은이가 병들고 기력 없이 환자용 침상에 누워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돈도 잘 벌고, 공부도 잘하고, 기계도 잘 만지고, 게다가 요리며 청소며 집안 살림까지 못하는 게 없어 내 기를 죽였었던 이 늙은이가 침대에 누워서 내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나는 내가 그동안 받아왔던 것을 다 돌려줄 것이다.


"얘야, 이거는 어떻게 하니? 요샌 기계들이 하도 자주 바뀌니 도무지 사용법을 모르겠구나."


"얘야, 병원밥만 먹다 보니 입속이 까칠해서 그런데 우리 집 정원에 가서 풀을 뜯어다가 페스토를 좀 만들어주렴. 오늘은 그걸 국수에 비벼먹고 싶구나."


"얘야, 답답해서 그런데 나를 바닷가에 좀 데려다주겠니? 그럴 시간이 있겠니?"


"얘야, 자동차 좀 중고상에 팔아주겠니? 자동차 탈 일이 없는데 보험료만 나가는구나."


"걱정 마세요, 다 해드릴게요. 제가 이래 봬도 운전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자동차도 좋은 값 쳐주는 곳에 내다 팔 수 있어요."


살면서 잉그리드가 누구의 살뜰한 보호를 받아봤을까 싶다. 클때부터 형제들 챙기느라 바빴고, 시집와선 시댁 식구들의 외면을 받았고, 나이들어선  자식이라곤 아들만 둘을 낳았고, 며느리라고 하나있는 것이 남같이 뚱하여 살뜰히 정을 주지도 않고. 겉으로 보기엔 괄괄하지만 늘 밑지는 장사만 하고 살아온 여자, 나의 시어머니. 지금은 못하지만 그때가 되면 누구나 기대고 싶어 하는 이 여인을 한 번쯤은 내가 보호해주고 싶다. 또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노인네를 옆에 앉혀놓고 지청구도 주고 칭찬도 받아보고 싶다.



하나도 슬픈 이야기가 아닌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건 또 무슨 감정인지...





놀라지 마시라!

당신이 잉그리드를 어떻게 상상했든 이 사진은 그 상상 이상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의 잉그리드. 이런 미인 흔하지 않다. 내 시어머니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그녀는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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