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남편과 친정 아버지의 수다
아부지, 사투리 좀 쓰지 마소
독일 사람인 우리 남편 방만구 씨(중국어를 전공한 관계로 중국 선생님이 지어준 한자 이름)가 나와 결혼을 앞두고 처음으로 우리 집에 왔을 때였다. 우리 집에서 며칠을 지냈던 그는 우리 식구들에 대해 다소 이색적인 소감을 말했었다. 사무라이 가족 같다고. 지금까지 동양인의 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없다 보니 그는 그저 자기가 지금까지 알아온 동양의 이미지인 일본, 그것도 사무라이 영화와 우리 가족을 연결시켜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우리 집안이 사무라이 같진 않더라도 좀 고전적인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얼마 전 조상님의 묘를 손질한다는 명목 하에 집안 어른들을 비롯한 모든 아들들이 돈백만 원씩 희사를 한 적이 있었고, 해마다 업데이트된 족보를 인쇄해다가 각 친지들에게 돌리는 것도 집안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뉘 집 큰일을 치른다 하면 모든 친척들이 전국에서 일사분란하게 집합한다. 그 예로 우리 할머니 돌아가실 때.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실 뻔한 고비를 대여섯 번은 넘긴 걸로 아는데 그 정도 모이면 지칠 만도 하겠지만 고비마다 어김없이 전국의 모든 친척들이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11남매 중 밑에서 셋째다.
그리고 사무라이 가족의 중심에는 누구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있다. 내가 생각해봐도 좀 사무라이 같은 구석이 있는 양반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젊은 시절의 깡다구가 많이 희석된 면이 있지만. 초등학교 때만 해도 그 어린 나이에 20리 길을 6년 동안 걸어서 학교 다니셨다. 여름에야 날씨가 따뜻하고 해가 길어 다닐만하다지만 겨울엔 20리 길이 꼬마들에겐 춥고 힘든 길이다. 그 길을 논두렁에서 주운 마른 소똥으로 불을 지펴가며 동생들을 데리고 6년을 다니셨다.
그 후 경주중학교엘 다니면서부터는 작은 삼촌들이랑 자취를 하셨는데 쌀이 떨어지면 기차값 아낀다고 경주에서 옥산까지 60리 길을 쌀가지러 오셨단다. 그 쌀가마니를 지고 중학생이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산길(당시엔 호랑이를 목격한 사람도 심심찮게 있었다고 함. 믿거나 말거나)을 오르락내리락했으니 깡다구가 생길 수밖에. 그렇게 쌀가마니로 단련된 몸을 가지신 아버지에게 한 가지 자부심이 있다. 중학교 때 고등학생 둘을 상대로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 우리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얘기가 부풀려진 무용담이 아니란 것을 안다. 그는 키가 작아도 아주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어서 웬만한 상황에선 좀처럼 기가 죽지 않는 양반이다.
딸은 아버지 같은 신랑을 만난다는 말을 누가 지어냈을까. 나의 신랑 방만구 씨는 우리 아버지와는 딴판이다. 그는 물살의 소유자, 덩치만 컸지 곱게 자라서 우리 아버지와 같은 깡다구가 없다. 쿵후와 빙슝을 몇 년씩 했다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우리 친정아버지의 적수가 절대 되지 못한다.
그런 방만구 씨가 결혼을 앞두고 친정 식구들에게 선뵈러 온 자리에서였다. 방만구 씨는 내가 시키는 대로 미래의 장인 장모께 어설프게나마 내키지 않는 큰절을 하고 내 옆에 앉았다.
"결혼이란 모름지기 서로 다른 환경의 두 남녀가 만나 화합하는 것으로서, 힘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이해하고...(중략)
태어나서 외국인이라고는 생전 처음 보는 우리 아버지, 읍민 체육대회 읍장님처럼 연설을 한차례 주욱 늘어놓으셨다. 연설이 끝나고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란 것이 이름만 대화지 사실은 일방통행이요 상명하달식이다. 상대가 한국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앞으로 싸우지 말고 잘살아라' 하면 '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이해하고 살아라'하면 '예', '앞으로 한국말을 열심히 배워 친정식구와 대화에 힘쓰거라' 하면 '예'. 우리 신랑 방만구 씨는 대학에서 학기 한국어를 수강한 실력으로 제대로 이해는 못했지만 장인어른이 말할 때마다 공손하게 예, 예 한다.
이렇게 예, 예 하던 것이 독일에 와서까지 여전하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전화를 하는데 대부분 엄마와 대화를 하게 되고 어쩌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게 되면 예의상 여쭈어 본다,
"만구 씨와 통화 좀 해볼랍니꺼?"
우리 친정아버지 안 봐도 다 보인다,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 것이.
"그럼 함 바꿔봐라."
방만구 씨는 전화기를 들고 자기 부모님과 통화할 때처럼 소파에 누워서가 아닌 깍듯하게 서서 통화한다. 교과서용 초급 한국어로.
"아버님 안녕하세요?"
"그래, 니 잘 있었나? 거는 날씨가 우째되노, 한국 카마 춥제?"
우리 아버지는 초급 한국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를 마구 구사하신다. 어리둥절해하는 방만구 씨 얼굴뿐만 아니라 귓불까지 빨개졌다. 급한 김에 내가 빨리 힌트를 준다.
"날씨, 날씨."
무슨 소린지 알아챈 방만구 씨는 대답한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요."
날씨가 흐리건만 늘 연습한 대로 날씨가 좋다고 대답한다. 아버지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위를 두고 일장의 연설을 늘어놓으시곤 맨 마지막에 다서 다짐을 받으신다.
"둘이 싸우지 말고 잘 살아라, 즐겁게 살도록 노력하여라, 빠른 시일 내 한국말을 배우도록 하여라."
그때마다 방만구 씨는 허리까지 꾸벅거리며 아버지가 마치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예'라고 대답한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인류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목록에 빠져있다.
이런 대화가 있는 날이면 나는 그 두 남자가 참 사랑스럽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