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변봉투 사건이 생각나는 목요일 밤

이것들아, 그만좀 놀려!

by 오순이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저희 담임선생님은 어느 날 흰 봉투를 교실로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것은 채변봉투다.



그 봉투 속엔 얇은 비닐종이가 있었고 선생님께서는 거기에다 똥을 콩알만큼 넣어서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검지 손가락을 엄지손가락으로 자르는 듯한 시늉을 하시며 '콩알'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채변봉투를 가방에 고이 넣어서 집으로 들고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준비물을 잘 챙기는 모범생이었으므로 하루 종일 땅따먹기를 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숙제를 하기 위해 가방 속에 든 채변봉투를 찾았습니다.


어라!


가방 속에 분명히 넣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 봉투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초등학생에게 준비물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는 뭘까요? 아마 당신이 차용증이나 임대계약서를 잃어버린 일 정도 될 겁니다. 저는 놀라서 가방 속 내용물을 모두 꺼내보았습니다. 바른생활, 국어, 자연 교과서 속에 들어있나 싶어 다 털어보았지만 봉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으므로 저는 플랜 B를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플랜 B란 채변봉투 대용품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4가구가 사는 큰 집이었죠. 집 뒤편으로 큰 밭이 있어서 라면봉지나 상품 포장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거든요. 그렇게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다가 채변봉투 대용품으로 걸맞은 투명한 포장지를 하나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흡사 스타킹을 포장했던 포장지처럼 생기기도 했습니다.


포장지를 찾은 저는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갔습니다. 부엌문을 열었더니 엄마는 숙모와 함께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계셨죠.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저에게 혼구녕을 내셨습니다. 아마도 이미 저보다 두 살이 많은, 늘 배가 고픈 오빠가 한차례 부엌을 다녀간 적이 있었나 봅니다. 산적이며 육전이며를 다량 훔쳐먹었을 확률이 높죠. 오빠와 달리 나쁜 마음을 품지 않은 저에게 혼구녕을 내시다니...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글썽일 뻔했습니다.


부엌을 나와 장독대 주변을 한 두어 번 빙빙 돌다가 다시 부엌으로 갔습니다. 담판을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엌문을 열자마자 엄마는 너는 왜 또 왔니, 혼날라구? 하셨습니다. 숙모가 계신 자리에서 더구나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와중에 똥 얘기를 꺼낸다는 것이 창피해서 결국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8살짜리라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법이지요. 저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숙제를 실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봉투를 들고 변소로 향했습니다. 아, 쓰다 보니 채변봉투 대용품을 들고 변소로 향하는 8살짜리의 쓸쓸한 뒷모습이 상상이 되어 마음이 메여옵니다. 이제부터 적나라한 얘기가 시작됨을 경고해드립니다.


당시 제겐 두 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똥을 싸서 하드 꼬챙이로 콩알만큼 덜어서 봉투에 넣는 방법, 두 번째는 봉투를 궁둥이 밑에다 대고 콩알만큼만 덩어리를 내보낸 다음 끊는 방법.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매일 배달되는 조선일보 신문지는 산적을 장만하는 방바닥이나 지지미를 부치는 부엌 바닥에 깔려 그 쓸모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하드 꼬챙이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제 똥이라 하더라도 똥을 뒤적거리는 행위는 토가 쏠리는 행위이죠. 그래서 저는 깔끔하게 두 번째 옵션, '밑에다 대고 싸기'를 선택하였습니다.


똥통에 앉아 한 줄기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자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놈이 스무스하게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한 줄기가 드디어 빛을 볼 찰나, 저는 봉투를 엉덩이 바로 밑에다 대고 어림잡아 콩알만큼 나왔다고 생각되었을 때 있는 힘껏! 줄기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마음에 바로 내용물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런!


나름대로 콩알만큼 끊는다고 끊었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봉투 속에는 한 덩어리라 불릴 수 있는 양이 이미 안착해있었습니다. 봉투를 든 손이 따뜻해져 오더군요. 나름 생각해보니 많다면 많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다다익선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큰 콩도 얼마든지 있고요. 저는 봉투 속에 생각보다 많은 양이 담겨 당황하기에 앞서 숙제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취했습니다. 아버지가 사과를 깎고 있는 안방에 들어가 반짇고리에서 실 방구리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 실로 봉투의 끝부분을 단단하게 동여매고 봉투를 책가방 속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혹시나 내용물이 샐까 봐 봉투가 터질까 봐 가방을 메고 살살 걸어서 등교하였습니다. 아침 조회를 끝내고 선생님은 채변봉투를 걷었습니다. 채변봉투를 들고 분단별로 아이들이 나와 줄을 섰습니다. 우리 분단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저는 차마 똥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투명봉투를 꺼내 들고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봉투를 가방에 넣은 채로 가방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일어서면서 가방 속을 슬쩍 봤는데,


아뿔싸!


어제 넣은 것보다 두 배는 많아 보이는 똥들이 봉지에 들어있었습니다. 얇은 허벅지도 의자에 앉으면 눌려져서 두꺼워 보인적 있지 않습니까? 이 똥도 마찬가지입니다. 똥이 가방 속 책들 사이에서 눌려 납작하게 되는 바람에 양이 불어나 보인 것입니다.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저의 순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절망적인 눈망울을 한 채 한쪽 손으로는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방에 손을 넣어 똥 봉투를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가방에서 재빨리 봉투를 꺼내서 제출하려던 게 제 의도였지요. 드디어 제 순서가 되었습니다. 저는 손으로 잡고 있었던 똥 봉투를 재빨리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제 의도와는 달리 봉투가 제출되던 순간,


선생님은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선생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초등학생 1학년이 똥을 좀 많이 담아왔다 싶으면 그것을 숨겨주실 일이지... 선생님은 제가 제출한 똥 봉투를 선생님의 눈 정도 위치로 번쩍 치켜올렸습니다. 그것을 본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고, 배를 잡으며 웃었습니다. 교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집으로 갈까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뒷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올라가 뛰어내릴까... 다쳐서 입원을 하면 아무도 나를 비웃지 못하겠지. 어쩌면 아이들은 이렇게 웃은데 대해 약간의 죄책감조차 가질지 몰라.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엄마한테 혼이 날 것이 뻔합니다. 뒷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가기도 전에 집에서 쫓겨나겠죠. 체념은 모든 선택들중 가장 손쉬운 선택이죠. 저는 모든 걸 체념한 채 조용히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아있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똥 봉투를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선생님이 나가자 교실은 돗때기 시장처럼 시끄러워졌습니다. 저는 홍당무 얼굴을 하구선 조용히 앉아있었습니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제 바로 뒤에 앉은 윤기가 이렇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얘들아, 선생님이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지 아니? 선생님은 전교생에게 그 똥 봉투를 보여주기 위해 교실마다 돌아다니고 계시거든. 아마 한참있다가 돌아오실걸?


순진한 저는 윤기의 얘기를 듣고 똥봉투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우리 반이 1학년 3반이니까 선생님은 4반, 5반, 6반, 교무실을 찍고 2층으로 올라가 2학년 1반, 2반, 3반... 교장실에도 갔을까? 이렇게 천천히 세며 7학년 5반까지 왔을 때야 선생님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떠드는 아이들이나 저한테 야단을 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채변봉투에 똥은 콩알만큼 담는 거랍니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전교생들에게 퍼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 입으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당시 우리 학교 3학년이었던 오빠가 그 얘길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채변봉투 제출하던 날 있잖아, 우리 학교 1학년 중에 라면봉지에 똥을 크게 한 덩어리나 싸붙여서 들고 온 애가 있었대! 킥킥.


이렇게 이 사건은 왜곡되고 부풀려져서 입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학년이 바뀌어도 내가 1학년 때 3반이었던 아이들 중 누군가는 우리 반이 되어서 채변봉투를 제출하는 날만되면 그날의 일을 크게 떠벌였지요. 이렇게 저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채변봉투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요, 채변봉투를 걷는 날이 오면 정말이지 감나무에 올라가고 싶었다니까요. 그리하여 초등학교 졸업식날 저는 기뻤습니다. 저를 놀리는 남자애들이 없는 여중에 들어가게 됐거든요. 채변봉투의 굴욕에서 벗어나게 된 거죠. 뭘 그걸 가지고 그러냐 싶죠? 제 아픔이 상상이 안되죠?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여러분, 제가 초등학교에 어땠냐면요, 요샛 말로 인싸였다구요. 공부를 잘해서 졸업 땐 반에서 2명만 받는 우등상을 받았다고요. 게다가 반장, 전교회장, 악대부 부악장, 합창부. 학교에서 열리는 각종 대회에 참가하면 1등은 못해도 참가하는 족족 입상할 정도는 되었지요. 웅변대회, 글짓기 대회, 피아노 콩쿠르, 퀴즈대회, 엄마는 농사짓느라 바빠서 학교에 오지도 않았으니 치맛바람 같은 건 없었고요, 순전히 제 실력이었다고요. 하지만 채변봉투 사건의 위력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이런 인싸의 행적들을 다 집어삼키는 거예요. 그래서 초등학교 재학 당시, 아니 졸업 후에도 오랫동안 친구들 사이에서 제 아이덴티티는 언제나 '똥 많이 가지고 온 애'였죠. 제가 서울대에 들어갔다면 '똥 많이 가져온 서울대 생', 판사가 됐다면 '똥 많이 가져온 판사'로 불렸을 거예요. 절대 없어지지 않을 타이틀이죠. 여러분이 저라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나이 마흔이 넘어서 동기중 하나가 저를 초등학교 밴드에 초대하였습니다. 저는 조금 망설이다 가입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나왔는데요, 제 성향 자체가 어디 한 곳에 있는 걸 못 견디고 옮겨 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중학교 이후부턴 늘 대처로 대처로 다니다가 결국 서울까지 오게 되었죠. 직장생활도 평범하지 않고 좀 유니크한 곳에서 했고, 외국으로 많이 떠돌다가 외국 남자랑 결혼했고. 그러니 성인이 된 후에도 자뻑이 좀 있는 저의 생각입니다만, 친구들 사이에서 좀 회자되는 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밴드에 제가 등장했습니다. 30년을 못 본 친군데 좀 따뜻하게 환영해주면 어디가 덧난답니까? 제가 밴드에 초대되어 등장하던 날 친구들의 한결같은 인사가 뭔지 아십니까?


여기 똥 많이 가져온 애 들어왔네.


안 그래도 똥 냄새가 어디서 이렇게 풀풀 나노 했지, 똥순이 반갑다!


그 똥 많이 가져온 애가 너였니?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네.


너무 놀리지 마라, 삐져서 나갈라.


이러는 겁니다. 남자 동기들이요. 사실 이런 반응이 20대까진 참 싫었어요. 아가씨한테 한두 번도 아니고 늘 똥똥 해대니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 타이틀이 솔직히 싫지만은 않네요. 다른 이에게 기억될만한 포인트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아무도 기억해주지 못하는 친구도 있는데 말이죠. 저만 오면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똥 얘기를 하니 분위기 유쾌해져서 좋고요. 세상에 성공한 사람 잘난 사람 천지지만 저같이 독특한 타이틀을 가진 사람은 없거든요.


그런데 윤기 말입니다. 선생님이 전교생에게 제 똥 얘기 알리고 다닌다고 그랬던 그 친구 있지 않습니까. 윤기를 밴드에서 만났는데요, 자기가 그 얘기한 걸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저는 윤기가 등장했을 때, 저 자식 저거 나한테 굴욕을 던져준 자식, 오대수가 왜 15년 동안 만두를 먹은 지 아니? 모래나 바위 덩어리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란 뜻 아니? 이러면서 속으로 씩씩거렸는데 좀 허탈합디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충분히 왜곡될 가능성이 있지

요. 어쩌면 윤기가 안 그랬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다른 뜻으로 얘기했는데 제가 곡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저만해도 채변봉투에 대해 과대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설마 전교생이 그 사건을 알았겠습니까. 제가 그 사건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다 보니 스스로 전교생이 다 그 얘길 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망상이죠. 아닌 게 아니라 어렸을 때 워낙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이라 그런지 이 글을 쓰면서도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그 얘기를 아는 친구가 있을 거란 생각이 슬슬 듭니다.


혹시 그런 친구 있습니까? 1학년 때 3반, 조현식 선생님네 노란 깃발반? 있으면 커밍아웃 좀 해주세요. 제가 아주아주 반갑게 인사해드릴게요. 우훗.


얘기를 마치려는데 갑자기 우리 엄마 생각이 나네요. 똥 봉투 사건을 간접적으로나마 생기게 한 장본인 아니겠습니까. 제가 밴드에 가입한 후 그 사건을 친정엄마한테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얘길 듣고 친정엄마가 서럽게 우시더라고요. 늙어서 마음이 약해져서 그러신가, 그래도 우는 건 좀 오버 아닌가요? 이러면서 울어요.


아이고, 에미가 살뜰히 챙겨주지 못해서 네가 초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힘들게 보냈구나. 불쌍해서 어쩌니...


저는 그때 좀 놀랐어요. 친정엄마가 저랑 같이 푸하하하 웃을 줄 알았거든요. 똥 얘기잖아요. 똥 얘긴 웬만하면 다 웃긴 얘기고요. 근데 엄마 마음이란 건 그런 게 아닌가 봐요. 다른 사람들은 다 웃어도 엄마는 자식 심정부터 헤아리게 되나 봐요. 맞아요, 그때 저 좀 서러웠어요, 지금은 아무 일도 아닌 척 말하고 다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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