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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Feb 09. 2017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XIII

'공존'



 육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네 발로 걷기 시작하고 스스로 젖을 찾아 생존해나가는데, 어째서 인간은 태어나 이다지도 긴 시간 동안 생존능력이 전무하고 오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어릴 적 자주 시청한 동물의 왕국에서는 기린이나 코끼리 새끼들이 출산 직후에 곧바로 일어서서 어미의 젖을 찾아 무는 장면을 곧잘 볼 수 있었다. 이는 육상의 포유류뿐만 아니라 돌고래나 고래 등의 해상 포유류들도 비슷했다.


 제노를 처음 우리 가족으로 맞이했을 때 제노는 생후 약 2개월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칠 것도 많았고 훈육할 부분도 상당했기 때문에 자견부터 개를 기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생각은 딸아이인 햇살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히 틀린 것이었음이 서서히 증명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이 하나를 육아하는 것보다 허스키 서너 마리를 육견 하는 것이 더 수월하고 덜 신경 쓰이는 일일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제노(2세) & 햇살이(1세) - 햇살이가 아빠를 흉내내어 제노오빠에게 간식을 주려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훼이크 ..


 제노를 데려온 지 4개월이 조금 넘었을 무렵 햇살이를 가지게 되었다. 제노의 막장 유년기와 한여름의 지옥 산책 등을 겨우 넘기고 숨을 돌릴 즈음하여 햇살이의 출산일이 다가왔고, 제노는 출산과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캠프에 다녀오게 되었다.


 워낙 제노가 성격적으로 모난 부분이 없고 훈육에 애를 쓴 탓에 아이와 잘 지낼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햇살이도 제노도 사실 햇살이가 돌 무렵이 되기 전까지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멀뚱멀뚱 인지만 하고 있었을 뿐, 크게 서로 다가가거나 반응을 하지 않았다. 반려견이 암컷일 경우 집에 아이가 있으면 모성본능이 발휘되어 서로 더욱 잘 지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제노는 중성화를 거쳤다고는 하지만 수컷, 그리고 한창 뛰놀고 먹는 것에만 관심이 넘치는 한 살이었고, 햇살이는 목 가누랴 이유식 받아먹으랴 뒤집으랴 배밀이하랴 짚고 일어서랴 걸음마하랴 공사다망하셔서 서로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일 년을 보냈다고 회상할 수 있다.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한 시점은 제노가 두 돌을 맞이하고, 햇살이가 본격적으로 걷고 뛰어다니기 시작한 돌 무렵부터였다. 제노는 말괄량이 호기심 덩어리이던 한 살 시절과는 달리 여유와 낮잠을 즐길 줄 알게 되었고, 햇살이의 후기 이유식이나 간식 부스러기가 제법 먹을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편 햇살이는 자기가 걷고 뛰어서 닿을 수 있는 곳에 감촉이 좋은 희고 푹신한 늑대 형상의 생명체가 돌아다니고 움직인다는 사실이 마냥 좋다고 느낀 것 같다.


누워만 있다가, 침대에만 갇혀 있다가 열심히 제노오빠를 쫓아다니기 시작한 햇살이. 가끔은 제노가 도망다닌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녀석들의 교감과 소통이 시작된 것은. 햇살이는 제노의 촉감이 좋은지 뒤뚱뒤뚱 쫓아다니기 시작하고, 제노는 햇살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이나 간식들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햇살이는 한 술 더 떠 아빠가 제노오빠에게 간식 급여하는 장면을 보고는 간식 봉지를 집어 들고 제노오빠를 쫓아다니며 간식 주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제노는 또 그걸 받아먹으려고 다가와 좋아하지만, 아직 지퍼락을 열 수 없는 햇살이의 훼이크에 농간을 당하고 씁쓸하게 꼬리를 돌리곤 한다.




너...너희 뭐하니..


 신기한 점은 햇살이가 제노를 언제부터 '개'라는 동물로 인식을 시작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분명히 개라는 동물들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여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장난감 가게의 인형 코너에 가면 치와와든 코카스패니얼이든 비글이든 강아지 인형만 골라 들고, 늘 시베리안 허스키 인형을 들고 다니면서 "제노오빠 어딨어?" 하면 온갖 강아지 인형을 가리키곤 한다. 고양이나 뱀, 기린 인형은 쳐다도 안 본다. 물론 제노가 곁에 있을 때는 제노 곁으로 달려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팡팡 친다. "제노오빠 여기 있지!"라는 표정으로.


큰 개의 존재에도 햇살이는 적응이 완료되어서, 함께 주말 산책을 하다가 마주치는 말라뮤트나 래브라도, 골든 레트리버와 같은 대형견들이 다가와도 행복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즐거워한다. 제노오빠의 친구 내지는 동족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일까. 아주 어릴 적부터 반려 동물에 대한 호감과 애정을 가지고 커갈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큰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 보면 호기심은 있으면서도 교감해 본 경험이 없어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멀리 떨어져 걷거나 주저하는 어린 친구들을 많이 만난다.


 얼마 전 마주친 일본인 아이들 한 무리가 있었는데, 대략 네댓 명이 제노를 보고 너무나 호기심을 보이길래 와서 인사하고 만져봐도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제노와 인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함께 놀 수 있게 해주자 그중 한 아이가, "나 태어나서 이렇게 강아지와 놀아본 건 처음이야!"라고 흥분해서 친구들에게 외쳤다. 이는 비단 일본 아이들 뿐 아니라 도시에서 자란 많은 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길에서 마주친 서구 문화권 아이들은 반려동물에게 접근하는 올바른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반면,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부모들의 반응도 거의 극단적으로 상반된다. 서구권 부모들은 우선 견주에게 자신들의 아이로 하여금 강아지에게 다가가도 되는지 의사를 묻게 하고, 동의를 구하면 그때부터 아이에게 반려견에 접근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며 시범을 보인다. 이제껏 길에서 마주친 서구권 가족이 300명이었다면 그중 280명은 그랬다. 반면 우리 부모들은 제노를 마주칠 경우 절반은 아이들을 위험하다며 등 뒤로 잡아끌어 숨겼고, 다가온 경우 견주의 허락을 구한 경우는 약 20%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큰 개일 경우에 만져봐도 되냐는 허락을 구하는 편이다. 나머지는 "물어요?"라고 묻고는 공격적이지 않다는 답변을 듣고 나면 자기들 마음대로 손을 뻗어대고, 원하던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놀라 움츠리고 멀어져 간다.


 허락을 구해서 아이들을 제노에 접근시키는 경우에도, 대부분의 경우 내가 나서서 아이들에게 접근 및 소통 방식을 가르쳐주어야 했다. 결국 모든 것은 대형견을 접할 경험이 서구권에 비해 턱없이 적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어린아이들에 있어 반려 동물과 나눌 수 있는 교감과 정서적 소통은 부모나 형제자매가 베풀어줄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위와 같은 상황을 겪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는, 제노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강아지와 소통하고 일반적인 대형견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거나 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려 애를 쓰는 편이다.




 물론 아이와 반려견, 특히 제노 같은 대형견을 함께 양육한다는 것은 쉽기만 한 일이라거나,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만큼 더욱 깊이 신경을 써야 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또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추후 [함께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부제를 달아보다 자세히 소개하고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볼 생각이다. 이번 편은 햇살이와 제노가 함께하는 이야기이므로... :)  )


 

햇살이는 허스키 인형을 두개씩 들고 다닌다. 제노까지 있을 때면 마치 돌쟁이 아가가 허스키 세 마리를 끌고다니는 듯한 진기한 장면을 볼 수 있다.

 햇살이와 제노를 함께 양육하겠다는 결정과 선언을 했을 때 처음으로 부딪힌 것은 집안 어른들의 우려와 반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노는 밖에서 뛰노는 것이 일상인 혈기 왕성한 25kg의 대형견이고, 신생아부터 돌 무렵의 아가는 무력하고 또 외부의 모든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취약하고 민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제노가 내 털북숭이 아들이 아니었다면, 남의 집안의 일이었다면 나조차 우려를 표하거나 반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제노는 우리의 첫아들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다만 마음으로 낳았고 지나치게 체력이 좋으며 털이 좀 많을 뿐,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는 갓난아기 시절부터 도맡아 모든 것을 가르치고 혼내고 얼르고 안아주며 보살펴 온 우리 자식이었다. 제노 엄마와 나의 이런 진지한 책임감과 자세에 집안 어른들도 이따금씩 우려를 표하셨을 뿐 크게 반대를 하시지는 않게 되었다. 사실 제노 어릴 적부터의 애교와 사랑스러움에 집안 어른들도 이미 깊이 정이 들어 있었고, 당신들이 겪은 녀석의 성정과 성품을 보건대 어린아이와도 큰 무리 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신 모양이었다. 큰 순풍이자, 다행이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제노 아빠인 내 고집이 너무 완강해서 다들 더 말씀을 꺼내지 않으신 건지도...)


 이처럼 서로 다른 모습의 한 생명, 두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많은 역경과 역풍, 그리고 행복과 때로는 행운을 동반하는 길이다.


아빠와 엄마가 태어나 가장 잘한 결정은 너희 모두와 함께 가기로 한거란다.




 햇살이는 요즘 제노를 정말 좋아한다. 산책만 다녀오면 신이 나서 현관까지 달려 나와 제노 오빠와 아빠를 맞이한다. 그럴 때면 방금 전까지의 혹한이 다 녹아 사라지는 것만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햇살이가 잘 자고 있는 제노 오빠를 손바닥으로 두들겨 깨운다거나 꼬리를 만진다거나 해서 놀라게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나름 오빠라고 의젓하게 다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동생을 졸졸 따라다니는 제노도 기특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부쩍 햇살이의 방이 궁금해 안달인 걸 보면 제노가 햇살이의 방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어릴 적부터 자란 개들은 자기를 '개'가 아닌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는가.


 다소 정신은 없지만, 애기들 엄마와 늘 저녁나절마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부를 만큼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되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하나씩 맞추어져 가고 있는 듯하다.


어디까지든 좋으니, 한번 가보자꾸나 얘들아

 이 모든 '공존'을 이루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또 기다리고, 또 애써왔는지 모르겠다. 작년 이맘때쯤 내 꿈은 아가들 엄마와, 제노와, 햇살이와 함께 넷이서 공원으로 유모차를 끌고 산책 나가는 장면이었다. 물론 아직 갖추어야 할 것들이 수도 없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아주 작고 소박한 장면일지언정 꿈꾸던 그 장면이 이루어졌음에 진심을 다해 감사하고 있다.


 이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시리즈는, 비록 작지만 그 꿈을 실현해 준 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써내려가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글이다. 앞으로도 보다 즐겁고, 미소지어지는 시베리안 허스키, 나아가 그를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를 따뜻한 그림으로 전하고자 노력을 기울일 셈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예쁘게, 함께 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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