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신발 신기는 일은 늘 나의 몫이었다. 우리 가족이 외출하기 전 매듭지어야 하는 마지막 과제이자 바깥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첫 단계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발에 걸치는 물건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어서 무엇을 신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현관에서 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저 용도와 상황에 따라 걷기 편한, 운전하기 편한, 점잖으면 그만인 잡화이자 장신구 정도로만 여겼다.
아이들은 달랐다.
오늘 아침 햇살이는 신발장 가장 깊숙한 곳의 빨간 리본이 달린 미니마우스 신발을 골랐고, 별님이는 수많은 스누피와 우드스탁이 어지럽게 뛰놀고 있는 운동화를 신겠다고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고집을 부렸다.
빨간 리본 신발은 이미 3 주쯤 전부터 신기는 데 애를 먹고 있던 터였다. 햇살이의 유난히 높은 발등과 넓은 발볼이 운동신경과 균형감각에는 큰 도움을 주었지만 녀석이 고집하는 발랄하고 깜찍한 신발 취향과는 영 맞지 않았다. 발볼에 여유가 있거나 발등 부위에 신축성이 좋은 소재를 사용한 신발은 대부분 본격적인 운동화 모양이나 남성스러운 색이나 실루엣을 띄고 있었다.
같은 사이즈, 심지어는 한 치수가 큰 신발인데도 소재나 형태에 따라 전혀 신을 수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아내는 늘 햇살이에게 새 신을 신길 때마다 조마조마해했다. 실제로 비싸게 주고 산 적지 않은 수의 단화나 구두들이 한 번도 햇살이의 발에 걸쳐지지 못한 채 창고에서 다음 순번인 별님이의 착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이가 겪는 신발 생활의 어려움이 신체적인 구조에 기인한 것이라면 별님이가 겪는 난관(?)은 남다른 성장 속도와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에 그 원인이 있었다. 별님이는 또래들에 비해 덩치가 훨씬 컸으며 발 사이즈 역시 그러한 성장세에 비례했다. 주로 햇살 언니가 신던 신발을 신었지만 가끔 새 신을 선물해도 한 달 이상 신기기가 쉽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양말을 벗기거나 찍찍이를 느슨하게 부착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어떤 신발도 별님이의 폭발적인 성장 속도를 너끈히 버텨낼 수 없었다.
가스밸브를 잠그고 창문들을 점검한 엄마가 현관에 나왔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상대로 발에 들어가지 않는 신발을 설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햇살이는 한창 자기 입맛대로 꾸미고 외출하는 일에 재미를 들일 나이였고, 별님이는 그저 마음 따라 언니 따라 마구 우겨대는 월령이었기에 엄마가 나와서 목격한 현관과 신발장의 광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직도 애들 신발 안 신기고 뭐 하는 거야?"
"엄마! 아빠가 미니마우스 신발 못 신게 해!"
"엄머! 멍멍! 멍멍!"
햇살이는 기다렸다는 듯 하소연을, 아직 문장 구사가 어려운 별님이는 스누피 신발을 가리키면서 격렬한 감정을 표출했다. 나 역시 아직 신발은커녕 한쪽 발만 고무 슬리퍼를 걸친 채 주저앉아있었다.
"이틀 전에만 해도 겨우 들어갔는데 오늘은 도저히 발이 안 들어가네.. 별님이 스누피 신발도 양말을 두꺼운 걸 신고 있으니 도저히 잠기질 않아....."
"또 안 들어가? 내가 해볼게."
한참을 아이들 발과 신발을 쥐고 낑낑대던 아내도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또...' 아가들 엄마의 표정이 소리로 들려오는 듯했다.
물론 아이들 사이즈에 맞는 신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육아를 수년 째 하고 있는 집이다 보니 당연스레 사이즈마다 색깔, 용도별로 여러 켤레가 준비되어 있다. 문제는 아이들이 신고 싶어 하는 신발이 늘 아이들 마음속에 정해져 있다는 점. 억지로 다른 신발을 신겨 나가면 하루 종일 툴툴거리는 소리에 시달리거나 어디선가 툭! 하고 벗어던진 신발의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이 신발에 주관을 갖기 시작하는 무렵은 아마도 신발 사이즈 기준 130 근처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그 무렵부터 신발을 구매할 때 까다로운 요구사항들이 하나 둘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결국 설득을 시작했다.
햇살아. 너도 알겠지만 저 빨간 미니마우스 신발은 햇살이가 아가 때부터 신었던 신발이라서 이젠 어린이가 된 햇살이한테는 작아진 것 같아. 엄마랑 아빠가 햇살이 마음에 쏙 드는 리본 달린 신발이나 날개까지 달린 신발로 새로 사줄 테니까 오늘은 저 무지개 반짝이 예쁘게 붙어있는 운동화 신고 나가면 안 될까?
별님아. 음... 여보, 별님이한테 스누피 신발 쥐어주고 그 틈에 핑크색 운동화 신기자. 그리고 스누피 신발은 그냥 자기가 안고 다니게 해주자.
오케이.
충분히 성공적이고 설득력 있을 협상안이었다.
물론 모든 그림이 우리의 협상안대로 예쁘게 펼쳐지지만은 않았다. 햇살이에게는 날개 달린 노란 신발은 물론 반짝거리는 유니콘이 그려진 백팩까지 함께 사주게 되었다. 스누피 신발을 품에 안고 차에 탑승하신 별님이는 멍멍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 나머지 입 근처로 가져가는 바람에 결국 엄마에게 보물을 빼앗기고 한바탕 대성통곡을 했다. 어떻게든 그렇게 치열하고 평화로운 일상적인 하루가 지나갔다.
"자기야, 오늘 저녁에는 애들 재우고 애들 신발 좀 주문하자."
"그래. 계절이 지나가니까 또 신발들이 다 작아졌더라. 사이즈 몇으로 봐야 해?"
"이번에는 185에서 190 정도로 사야 적당하겠더라고. 마지막으로 주문한 신발들이 사이즈가 몇이었지?"
"가을에는 160.... 겨울에는 170이었어....."
아주 잠시 거쳐갈 뿐인 아이들 신발 사이즈와 함께 또 한 계절이,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