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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Dec 10. 2022

늑대가 나타났다

거짓말쟁이들의 마을 - 6


계속해 움직였다. 아침이면 하얀 바람은 어느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지점까지 나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다가가면 뒤로 움직여 거리를 벌렸고 반대로 멀어지면 따라와 간격을 좁혔다. 처음에는 몇 차례나 늑대가 서 있는 방향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는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뒤로 물러날 뿐 나를 어딘가로 인도하려 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초목의 키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덧 울창한 숲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탁 트인 평원 전체가 시야를 가득 메우는 언덕배기에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  바닷빛 하늘에는 위로 솟은 구름과 아래로 내리 꺼진 구름 덩어리들이 드문드문 떠 있었다. 지나온 숲이 대지에 낮게 깔려 있는 느낌이라면 눈앞의 평원은 대지 위로 뻗어있는 모습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마주한 풍경은 순간적이지만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토록 눈가가 촉촉해질 정도의 광경은 경외심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시야가 닿는 지평선 그 어느 곳에도 쉬어갈 만한 바위나 암석지대가 보이지 않았다. 평원 근방만 해도 숲과는 땅의 구성이 확연히 달랐다. 어쩌면 이제까지 고수해 온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몇 날 며칠씩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얀 바람이 알맞은 자리를 대신 찾아줄 리도 만무했다. 끝없는 고민과 문제를 마주해야 하는 여정을 뒤로하고 숲 속으로 들어가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는 어쩐지 도망처럼 느껴졌다. 도망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평원을 바라보며 앉아있자니 무엇보다도 바닷빛 하늘이 좋았다. 빽빽한 나무들보다 자유분방한 구름의 모양새가 좋았다. 수풀 사이로 훔쳐보던 햇빛을 거리낌 없이 만끽할 수 있어 좋았다. 다만 밤이 오면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아 두려웠다. 길을 함께하는 늑대가 곁을 떠날까 두려웠다. 홀로 출발한 여정인데 언제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결정을 내리기란 늘 쉽지 않다. 숲과 평원의 경계에 놓인 언덕에 주저앉은 채 결론이 날 때까지 쉬기로 결심했다. 한참을 앉아만 있으니 거리를 유지하던 늑대도 휴식을 취할 시간인 줄 알고 느릿느릿 다가왔다. 광대한 평원을 앞에 둔 이 순간,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을 바라본 순간, 머릿속에 바닷빛이 떠올랐다.

다시 말해 나는 바다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가본 적도 없는 바다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중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도전을 앞에 두고 잠시 주저하기로 마음을 먹자 어쩐지 마음이 느슨해졌다. 이제껏 걸어온 길의 익숙함과 확실성을 뒤로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삶의 영역을 넓힌다느니, 새로운 도전이라느니, 용기를 낸다느니 하는 당찬 첫걸음과는 달랐다. 큰 도전인 동시에 신중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나는 숲과 평원의 경계 지역에 주저앉아 며칠을 보냈다. 늑대가 곁을 지켰다.

 

숲 속에서 눈을 뜬 이래 걷기를 결심하기까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태양이 하늘을 가로지를 때마다 나뭇잎을 한 장씩 쌓았다. 늘어난 잎들은 낙엽더미가 되었고, 어느덧 더미가 모여 언덕을 만들었다. 여러 계절이 지나고 언덕에서 피어난 첫 꽃잎이 바람에 날아 오른 날, 더 이상 태양의 일기를 세지 않기로 했다. 긴 시간을 숲에서 홀로 보내야 하는 현실에 염증이 났는지도 모른다. 벗어날 방도를 알고 있으면서 이를 실천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숲 속 어느 공터에 그저 숨만 쉬며 널브러져 있던 어느 날,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보자"


홀로 들은 탓에 환청인지 상상인지 진짜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미지의 목소리는 널브러져 있던 나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나는 이와 같은 신호 혹은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일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들려온 목소리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아진다. 진실은 항상 여정의 형태로 주어지는 까닭이다.


나 홀로 겪는 대각성의 순간, 어쩌면 그저 수줍을 따름인 내적 갈등의 순간을, 하얀 바람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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