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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Aug 14. 2015

완벽으로의 집착

눈부신 그림자를 좇다


 생일 케이크에 꽂는 양초의 개수가 늘어갈 때마다 깨닫는 진실이 있다.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 전 완벽해 보였던 그림은 2년이 지나자 식상해졌다. 7년 전 완벽하게 느껴졌던 인물은 3년 뒤 몰락했다. 5년 전 완벽하다고 여겼던 글은 불과 닷새도 지나지 않아 휴지통에 던져졌다. 완벽이라는 단어는 그저 희망하는 순간에 대한 낭만적 포착이자 그로부터 비롯된 환영일 뿐, 하루하루를 더 겪을수록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벽무결이란 영원히 도달하기 힘든 제로 느껴진다.


 세상을 완벽하게 파헤쳐 이해해보고 싶었다. 철저한 객관 자료에 의거한 자연과학의 눈으로, 뜨거운 가슴에서 울리는 신앙의 힘으로, 더 이상 날카로울 수 없는 논리성과 철학을 무기로, 그렇게 나누어진 세상을 나누어진 다각도에서 이해하려다 보면 보다 큰 그림, 어떤 완벽에 가까운 세상의 상像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희망과는 달리 세상은 서로 싸우기 바빴다. 과학은 무턱대고 신학이 어째서 성립할 수 없는지 객관 자료를 바탕으로 증명하려 했으며, 과학이 어째서 초超근본적이거나 원형原形적일 수 없는지에 대해 신앙은 논리와 증거라는 잣대 자체를 거부했다. 철학은 옆에 서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있을 뿐 영양가 있는 연결 고리 역할은 전혀 해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고 모든 것이 상충하는 동시에 생존을 위해 꿈틀대고 있었다.



 마치 그림자를 좇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좇아도 도달할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지겨워 정면으로 태양을 응시하려다 시력을 잃고 마는 비극처럼, '완벽'이라는 치명적 허상은 지나칠 정도로 눈부시고, 손에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아름다웠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야, 그리하여 완벽하게 하루를 살고 그 완벽함을 364회 반복해야만 비로소 완벽한 한 해가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스스 기계이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 인간이 완벽이라는 기준을 효율주의와 시간 관리 강박증에 두기 시작했는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주변의 모두가 완벽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떤 사고방식이 옳다, 그르다고는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이 있다.


 일반적인 완벽함이라는 것을 추구하던 시절엔, 소소한 그 무엇에도 깊이 있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10년 전 소위 말하는 '완벽한 삶'이라는 것을 꿈꾼 적이 있다. 그 당시 목표에 대해 적어놓은 기록을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유치하고 짧은 식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그 기록을 들추어볼 때마다 숨어서 이불킥을 한다면 날아간 이불이 대기권을 돌파할 정도로 낯이 뜨거워진다. 분명 이러한 기록도 앞으로 열 해가 지난 뒤엔 상당한 사적 치부가 되어있을 것이다.


 완벽의 존재에 대한 왈가왈부는 사실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신의 유무 논쟁과 다른 점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일상 속에 이미 깊이 스며있다는 점이다.


 꼭 일 중독자가 아니어도, 꼭 무언가처럼 되고자 열망하는 워너비(wannabe)가 아니어도, 어떤 일률적인 기준에 따라 선망하는 모습을 갖추어야만  보다 완벽해지는 것이라 여기는 순간 우리는 일종의 완벽주의자가  . 

 일반적으로 불만족과 불행의 시작은 어떤 일반적인 '완벽의 기준', 혹은 '더 나은 것'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허나 70억 인구가 존재한다면 그러한 기준의 종류 역시 70억 가지가 존재해야 하데, 문제는 수 백, 수 천, 심지어는 수 억의 개인이 불과 두어 가지의 잣대만을 이용해 자신의 삶을 측량하고 재단한다는 사실에 있다. 어떤 잣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누구와의 경쟁도 이루어질 수 없는 독보적인 행복의 기준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반면, 지상 대부분의 인구를 경쟁 상대로 돌릴 수밖에 없는 이른바 '끝없는 투쟁과 추월 시도'의 무대가 차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보다 낫기 위해, 또한 그래야만 보다 자신이 완벽해진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허나 그 길 위에 만족은 없었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1등을 하고 나니 그 위에는 반 1등이 있고, 반 1등 위에는 전교 1등이, 전교 1등 위에는 지역 1등, 지역 1등 위에는 전국 1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국 1등이라는 것은 매 년, 매 시험마다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끝없는 대전 상대 자판기와도 같았다. 눈앞의 모두를 상대로 인정하거나 상대 이하로 절하하거나, 시험의 난이도를 따져 지나간 역사 속 1등과 비교하거나 미래의 1등과 견주려 다. 어차피 아무리 그래 봤자 세계 인명 사전에 역사적 인물로 등재나 되면 모른다. 그 누구도 항상 다른 이들을 제치고 1등 만을  독차지했다는 이유로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예가 없었다.


 나름대로는 매우 논리적인 사고 과정이었고, 이성적인 성찰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냥 지금 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즐기면서 살자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세계 1등. 역사 속 인물. 어차피 원하거나 꿈꾸던 바도 아니었으며 그렇게 평가되는 이들 중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행복이 보장되지도 않는 1등이 되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소모할 바엔 그냥 매 순간의 행복, 그리하여 삶이 끝날 때 '행복했다'고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질서에도 행복을 느끼지만 무질서한 모습 속에서도 자연스러움과 인간미를 느낀다. 서로가 옳다고 핏대 세우는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어느 쪽이 옳을까 고민하거나 한쪽 편을 드는 사람들의 전체 풍경은 세상이 참 잘 짜여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A가 옳다는 사람, B가 옳다는 사람, 잘 모르겠는 사람, A도 B도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  그들을 지켜보는 ,  우리 모두가 함께 놓인 공간까지. 그 모든 것이 그림 속에 존재해야 비로소 진짜 세상의 모습을 담아낸 명작이라는 생각이 다. 모든 개체의 주장을 긍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장하는 모든 개체의 존재 자체는 긍정할 수 있다.


 누군가는 질서, 'cosmos'를 우주의 근본이라 말하는 반면 누군가는 혼돈, 'chaos'를 우주의 근본이라 주장한다. 그렇게까지 어려운 개념과 논리, 명제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전부 이해할 자신은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공존해야만  진짜 세상, 즉 유니버스 universe     하는 생각이 든다. 침실은 어질러져 있을  있고, 깨끗이 정리되어 있을 때도 있다. 어느 하나의 장면만을 침실의   모습이 단정 지을 수 없다.


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을,  의문을 던져본다.




 상식이라는 기준에서의 모든 욕구가 충족된 상태는 아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    , 행복하다.


어쩌면 행복이라는 감정의  부상浮上을  방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감추어진 완벽주의일지도 모른다.                                                                                                                                                                                                                                                                                                                                                                                   



"I spent a lot of years trying to outrun or outsmart vulnerability by making things certain and definite, black and white, good and bad. My inability to lean into the discomfort of vulnerability limited the fullness of those important experiences that are wrought with uncertainty: Love, belonging, trust, joy, and creativity to name a few."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인생의 모든 부분을 명확하게 가늠하려 애썼다. 흑과 백. 선과 악. 단호한 판단을 내리고 나면 삶의 취약한 부분이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불확실한 삶의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고, 늘 불확실성과 함께 찾아오는 인생의 소중한 경험과 가치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사랑, 유대감, 신뢰, 즐거움, 창의성, 그 모든 것에 있어서."


- Brene Brown,
브렌 브라운, 작가


삽화 : Jacek Yerka 作 (커버) / ⅰ. Eric Zener 作 / ⅱ. Jon Measures Artist 作 / ⅲ. Monument for Workholics, LA / ⅳ. Norman Rockwell 作 / ⅴ. Vincent Desiderio 作 / ⅵ. Alexander Bolotov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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