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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Aug 02. 2015

모퉁이를 돌면,

희망을 희망하다


 항상 회전하는 동전이 있다. 때로는 어깨 위에서, 감싸 쥔 무릎 위에서, 다음 발걸음을 디딜 자리에서 끝없이 돌고, 또 돈다. 언제부터 돌기 시작했는지, 누가 돌린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기억이 닿는 한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동전은 시선이 닿는 미묘한 위치에서 춤추고 있었다. 


 앞면에는 '절망', 그리고 뒷면에는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빠르게 회전하는 탓에 동전은 절망과 희망이 절반씩 섞인 색을 띠고 있었다. 희망이 찾아오는 듯 싶으면 절망이 나타났고, 절망이 보름달 형상의 정점을 찍고 나면 희망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삶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면 그 회전이 더욱 빨라졌다. 더 이상 절망과 희망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앞뒷면이 한 덩어리였던 절정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협주곡으로 치면 가장 곡이 빠르게 회전하는, 그 순간을 무어라 불렀던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희망을 엿보는 희망', 갑작스레 떠오른 이 말은 참 어려웠다. 평소에는 직시하지 않으려 애쓰던 현실을 끌어와 마치 방정식처럼 대입을 해 보았다. 


 "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층계참에서는 갓 구운 팬케익 향이 풍길 거야. 그리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면 엄마가 환하게 웃으면서 얼른 손 씻고 식탁에 앉으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팬케익을 세 장이나 구워놓았다고 하겠지."


 희망은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엄마의 팬케익, 미소, 그 따뜻한 향기, 기대에 가득 찬 층계 위로의 질주. 소년의 그 모든 무지갯빛 희망은 현재 '닫혀 있는 저 현관문'이라는 미지수를 건드렸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인 셈이다. 이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감히 상상함으로써 인간은 꿈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절망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발생한다. 소년이 품은 기대는 현관문을 여는 순간 팬케익 향기 대신 코를 찌르는 층계참의 퀴퀴함으로 인해 한 순간에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 꿈꿨던 향기, 미소, 팬케익은  가슴속에 떠올랐던 정확한 그 순서를 따라 연쇄적으로 붕괴해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영웅물이나 할리우드식 해피엔딩, 그리고 세상을 밝은 곳으로만 바라보고자 애쓰는 데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다소 잔혹한 장면일지도 모르지만, 명과 암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존하는 세상임에도 밝고 아름다운 그림만을 포착하려는 노력은 다소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인간을 절망의 연속에 더욱 깊이 빠뜨리는 주범은 이상의 세계를 온통 밝은 물감으로만 채색해두어 현실 세계와 괴리감을 느끼게 만든 이들인지도 모른다. 




 '저 모퉁이를 돌면 분명 멋진 일이 벌어질 거야'


 희망을 희망한다. 복권을 긁는 것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도, 지친 귀갓길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이는 모두 현재 상황에서 상상만 가능할 뿐 그 결과를 내다볼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즉, 핵심은 바로 '알 수 없음'에 있다. 


 논리와 이성으로 중무장한 과학자나 철학자들도 결국은 그러한 '알 수 없음'에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세상의 알 수 없는 부분을 풀어내기 위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해내기 위해.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이들이 어찌 보면 동시에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는 낭만 돌격대인 셈이다. 



 희망과 절망은 한 끗 차이의 단어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라는 표현만큼 적확한 표현도 없다. 우리는 같은 대상으로 인해 희망을 얻고, 절망에 빠지는 까닭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할 수 있어 삶에 희망을 얻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어 불행에 빠진다. 


 어렵게 준비한 시험에 합격하여 삶에 희망을 얻고, 불합격하여 절망에 빠진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희망을 얻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좌절한다. 


 누군가의 탄생에 행복을 얻고, 누군가의 죽음에 슬픔을 얻는다. 


 함께/부재, 합격/불합격, 희망/좌절, 탄생/슬픔. 이 모든 것은 같은 대상이 가질 수 있는 상반된 형태의 존재 방식일 뿐이며, 엄연한 현실의 모습이다. 언젠가부터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표현을 쉽게 내뱉었다. 요즘은 그에 대해 반성한다. 세상의 절반만을 바라보면서 '이상'이라고 지나치게 쉽게 말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은 항상 그랬다. 




  결론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어쨌건 희망으로 살아간다".


  거창하게 인류나 역사, 민족이라는 단어는 꺼내고 싶지 않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저 앞의 모퉁이'가 키워낸 자식들이다. 모퉁이가 선사하는 희망, 모퉁이를 끼고 도는 순간의 흥분과 희열, 모퉁이 너머의 세계에 대한 만족 혹은 불만족. 그 끝없는 반복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전방위에서 보인다. 동시에, 매번 반복하면서도 매번 익숙해지지 못하는 인간의 순수함에 놀란다. 어쩌면 그러한 순수함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모퉁이를 휙- 하고 도는 순간만큼은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가슴이 설레는 법이다.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 


협주곡(Concerto)에서는 그러한 절정의 순간을 두고, '카덴차(Cadenza)'라 불렀다.





“In another moment down went Alice after it, never once considering how in the world she was to get out again.” 


"바로 그 순간,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 내려가 버렸습니다. 어떻게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은 채."



- from the 'Alice in Wonderland' by Lewis Carroll

  루이스 캐럴 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中




* 삽화 : Thomas Kinkade (커버) /  Sam Szafran (ⅰ) / Ania Toledo (ⅱ) / Casey Baugh (ⅲ) / Gonzalez Rodel (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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