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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Jul 30. 2015

비를 맞는다.

자연스러움의 역설


 '마지막으로 비에 흠뻑 젖었던 날은 언제였을까....?'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하늘의 색이 무겁다. 언제든 왈칵 쏟아내 버릴 것 같은 표정이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다시 창밖을 흘깃 보니 아스팔트엔 검은 반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려면 빗속을 한참 걸어야 한다. 우산이 필요하다. 한숨을 내쉬며, 우산 대신 차키를 꺼내 든다. 빗속을 걷기 싫어 운전을 택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지하주차장으로, 지하주차장에서 또 다른 지하주차장으로, 그리고 또 다른 엘리베이터로. 요즘 엘리베이터는 쾌적하다. 덥지도, 습하지도 않다. 편하다. 둘러싼 공간을 바꾸기 위해 필요했던 일은 엘리베이터에 서 있기, 앉은 채 운전하기, 또다시 엘리베이터에 서 있기뿐이었다. 단지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하루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부자연스러워졌다.


 비 내리는 거리, 그 위에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의 그림을 좋아한다. 쏟아지는 하릴 없음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얼마 남지 않은 건조함을 지키고자 양손으로 감싸 쥔 그 악력의 절박함이 좋다.


 어찌 할 바 없는 자연의 독단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려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우비와 우산, 장화마저 챙겨 길거리로 나서는 이들의 삶에 대한 열정에는 존경심마저 든다.


  운명처럼 찾아오는 빗방울에 맞서거나, 피하거나, 완벽하게 막아내는 그들의 모습. 끝없고 변덕스러운 삶의 풍파 앞에 놓인 우리 모습과 흡사해 보이는 까닭일까.




  더욱 좋아하는 건 비 내리는 거리,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이들이다. 갑작스런 소나기, 챙기는 것을 잊은 우산, 흠뻑 젖다 못해 웃어버리는 얼굴들. 막막함, 예기치 못함, 마치 거대한 조류가 밀려드는 듯한 흐름 속  표정에서, 어쩐지 가장 순수하고 솔직한 인간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다.



 젖을 대로 젖어 모든 옷자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현관문을 열었던 마지막 기억은 언제였나. 급한 대로 신문지를 펼쳐 머리 위를 가려보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마지막 날은 언제였나.


 비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은 비와 늘 함께였음에도 오늘날 우리는 우산을 치켜들고 하늘의 애정 표현을 거부한다. 장대비, 가랑비, 소나기, 장맛비, 여우비, 어여쁜 이름을 다 붙여놓고도 그 무엇 하나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단비 소식 앞에서는 "잘 됐다"고 말하지만, 보슬비가 내리는 길거리에 우산 없이 발을 내딛는 일은 거부한다.


 젖으면 불쾌하다. 젖지 않으면 불쾌하지 않다. 하지만 가끔은, 완전히 젖어야만 유쾌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신발을 신은 채 바닷물 속으로 발을 헛디디면 불쾌하다. 다 내려놓고 풍덩 바다로 뛰어들면 그 순간부터 유쾌하다. 그리고 항상,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다.


 우산의 품은 꼭 필요하다. 자동차의 편리함과 안락함도 필요하다. 젖지 않을 수 있는 그 모든 절차는 소중하며, 인류 문명 발전의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중한 무언가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이상 내일은 우산을 챙기지 않고 집을 나서볼 예정이다. 하늘과  사이에 비를 맞는 것 이상의 직접적인 교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딱히 빗방울 닿는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지 않아도 좋다. 흠뻑 젖는 순간이 아무런 감동을 가져다주지 못해도 좋다. 축축함에 불쾌해져 앞으로는 우산을 가지고 다니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해도 좋다.



항상 비는 내렸다. 변한 것은 나였다.

너무 긴 시간, 비에 젖지 않으려 살아왔다.



* 삽화 : Alexander Bolotov (커버) / Gerald Harvey Jones (ⅰ) / Stanislav Plutenko (ⅱ) / Michael Tolleson (ⅲ) / Kenny Random (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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