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인, 비슬라바의 '살아있는 순간들',
글을 쓰지만 타인의 글은 되도록 필요 이상 많이 읽지 않으려 노력한다. 깊이 있게 잘 쓰인 글에 담긴 세계관과 경험이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쏟아져 밀려오는 탓이다. 마치 집채만 한 해일 앞에 무기력하게 서 있는 것처럼, 눈사태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것처럼 자신의 작음을 실감하게 되는 까닭이다. 열등감이나 무력감, 혹은 패배감과는 다르다. 하나씩 피땀 흘려 쌓아 올린 작고 소중한 나의 세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져 바다 위에 떨어진 물감 한 방울처럼 흩어져버리는 것이 슬프고 두려운 탓이다. 누군가는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최소한의 '나'라는 자각조차 없는, 그 무엇과의 경계선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죽음이라는 상상 속 그림만으로도 충분하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실은 간단한 경험담이다. 마치 자신이 가장 애절하고 통렬한 사랑에 빠져 있는 비극 소설 주인공 자리에 자신의 하루하루를 대입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깊은 마음과 열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착란으로부터 나를 구조한 것은 어떤 시인, 그리고 그의 읊조리는 듯한 시 한 편이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원고에 담긴 구절이다.
어쩐 일인지 아침부터 '순간'이라는 이미지가 자주 스쳐갔다.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길을 나설 때 누군가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모든 오늘 하루의 순간들 속에서 삶이 잠시 아득했던 11년 전 오늘의,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어렸다. 어려서 아름다웠고, 투박했고, 서툴렀다.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밀거나, 당기던 순간은 없었다고, 그렇게 기억은 말한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존. 그에 딸린 잠자고, 먹고, 일하는 등의 행위들. 지금이라는 이 순간의 불씨가 되었던 지나간 순간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오늘에 휩쓸려 어느 금고 속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다. 운 좋게 '같은 날짜', '비슷한 상황' 등의 열쇠가 주어지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금고를 열고 나오지 못한다. 오늘 내 손에 쥐어진 것은 '11년 전 바로 그날, '이라는 이름의 열쇠였다.
마지막으로 연서를 건넨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마음보다는 삶에 대한 야속함이 먼저 떠오른다. 인간미를 잃어가는 자신에 대한 책망보다 인간미를 느끼기 힘든 세상을 힐난한다는 것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일까.
꿈꾸던 날들에는 마른 들불처럼 한겨울의 산불처럼 타오르던 불길이, 꿈을 만나고 나니 꺼지지 않기 위해 얌전히 벽난로 속에서만 타오른다. 오늘 순수하지 못함을 무턱대고 반성하기엔 창밖의 바람이 거세다. 바람으로 꺼지는 불길이 있고 바람으로 번지는 불길이 있다. 과연 어느 쪽일까.
지하철역 입구 근처에 자그마한 꽃가게가 있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한참 동안 꽃을 들고 갈 생각을 하니 왠지 멋쩍었다. 가게를 지나쳐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쑥스러워하기 시작한 걸까. 언제부터 마음 가는 대로 선뜻 행동하지 못하기 시작한 걸까.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상황에서 그냥 지나치기 시작한 걸까.
정확히 내려온 지 28번째 계단에서 돌아선 다음, 다시 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장미 세 단을 엮었다.
꽃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이 있게 해 준 지난 기억들에, 지난 순수함에, 그 시절들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어쩌면 순수함이란 피 흘리며 지켜야 하는 것, 모든 현실을 무시하고 뛰어들어 취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순수함이란 그저 가끔 떠올리고 미소 지어주면, 그리하여 완전히 잊지만 않아주면, 그걸로 행복한 녀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둘 다 믿고 있다
갑작스런 열정이 자신들을 묶어 주었다고
그런 확신은 아름답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은 더 아름답다
그들은 확신한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수만 번 서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어느 회전문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순간을
군중 속에서 '미안합니다'하고 중얼거렸던 소리를
수화기 속에서 들리면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라는 무뚝뚝한 음성을
나는 대답을 알고 있으니
그들은 정녕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게 되리라
우연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들을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해
우연은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들의 길을 가로막기도 했으며
웃음을 참으며 훨씬 더 멀어지게도 만들었다
비록 두 사람이 읽지는 못했으나
수많은 암시와 신호가 있었다
아마도 삼 년 전,
또는 바로 지난 화요일,
나뭇잎 하나 펄럭이며
한 사람의 어깨에서 또 한 사람의 어깨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이 주웠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유년 시절의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공일지도
문 손잡이와 초인종 위
한 사람이 방금 스쳐간 자리를
다른 사람이 스쳐가기도 했다
맡겨 놓은 여행 가방이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어쩌면, 같은 꿈을 꾸다가
망각 속에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일 뿐
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삽화(순서대로) : Lucio Fontana 作 / Pavel Guzenko 作 / Igor Morski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