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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비게이션이 싫다

by WriteWolf


어릴 적, 어른들이 운전하는 차의 뒷자리에 타고 있으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앞자리에 앉은 어른들은 세상에 나 있는 모든 길을 다 아는 것 같았다. 창밖의 세상은 휙휙 지나갈 뿐이어서 나는 늘 어디론가 이동한다는 사실에만 주목했을 뿐 '어떻게'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길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 있고 또 다른 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하여 무엇을 향하는지에 대해. 교외의 어딘가로 나가는 날, 초행길에 오르는 날, 혹은 여행을 떠나는 날 전야에는 지도를 펼쳐 사인펜이나 마커로 지도 위에 표시를 하면서 어떤 길을 택할지 상의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사전 준비 과정에서 경로상의 주변 지리와 길맥을 미리 훑어본 어른들은 크게 헤매는 법이 없었다. 이번 출구에서 나가지 못했다고 해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다음 출구에서 나간 다음 올바른 방향을 되찾곤 했다.


지금은 내비게이션(길도우미) 시스템의 시대다. 휴대폰,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는 GPS 내비게이션 장치, 전자 지도 등의 길잡이가 어디에나 넘쳐 난다. 길 위의 과속 감시 카메라 위치는 기본이고 실시간 교통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우회로를 제시하기도 하는 기술력을 경험할 때마다 혀를 내두르곤 한다. 지구상에서 지도에 표시되지 않고 가는 길을 알 방법이 없는 곳은 이제 땅속밖에 남지 않았구나, 싶다. 최단 시간에, 최단 거리로, 최소 비용으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기계인 셈이다.


성격 탓일까.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최단 시간.

최단 거리.

최소 비용.

그리고 최종 목적지.


바로 여기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나는 내비게이션 장치를 싫어한다. 편리하고, 안전하고,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작정 항거하는 것은 아니다. 계기가 있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본가를 향해 차를 몰던 어느 주말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에서 본가에 도달하려면 시내를 관통해야 했고 그 길은 항상 혼잡했다. 평소 나는 차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맘 편히 길을 찾아가곤 했다. 그 녀석 하나면 길을 외울 필요도, 제대로 방향을 잡았는지 몰라 안절부절못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때는 주말, 관광객들로 붐비는 시내의 길 한가운데서 내비게이션 장치가 갑자기 작동을 멈췄다. 좁은 길 앞뒤로 차가 꽉 막혀 있었고, 어렴풋한 기억이 맞다면 본가로 향하는 길이 본격적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돌이켜보면, 길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비게이션 없이 삼청동을 통과해 정릉 쪽으로 빠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어설픈 기억이 독이라고 차들이 가장 많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서라도 갔다면 어디론가 합류했을 지도 모르지만 서너 차례 내비를 따라 지나가 본 기억을 더듬는답시고 몇 차례 방향을 튼 것이 화근이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처음 차를 멈춘 곳은 어느 비탈진 아파트 단지였다. 차를 돌릴 공간이 없어 한참 동안 진입한 거리를 후진으로 돌아나와야 했다. 이미 예상 도착 시각에서 30분이 지나 있었다.


또다시 헤매다가 도착한 곳은 바로 팔각정이었다. 이쯤 해서는 속된 표현으로, 정신줄을 이미 반쯤 놓은 상태였다. 허탈함과 분노를 넘어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주차장에 밀고 들어가 차를 세우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길을 완전히 잘못 들어서 지금 팔각정에 도착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식사를 하시라고 전했다.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하며 팔각정에 올라가 느릿하게 한 바퀴를 돌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열어(당시 내 휴대폰에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없었다) 생전 켜본 적 없던 지도를 켰다. 팔각정을 찾아 약 30분간 그 위치와 주변, 연결되는 도로들을 전부 공부하고 머릿속에 넣었다.


결국 본가에 도착한 것은 평소 1시간 걸리던 길 위에서 4시간 30분을 보낸 뒤였다. 팔각정에서 본가까지의 행로도 험난했다. 근처의 지리는 익혔지만 막상 그곳을 벗어나니 또다시 낯선 지역이어서 차를 멈추고 지도를 탐독한 다음 다시 출발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 했다. 운전대를 잡은 이래 가장 길게 느껴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던 4시간 30분이었다.


이날 나는 크게 깨달았다. 누군가는 "내비게이션의 소중함을요?"라고 물어볼지 모르지만 내 대답은 명백히 "아니오"다.


Wayne Thiebaud.jpg


내가 깨달은 것은 내비게이션이라는 편의 장치가 없는 길 위에서의 나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이었다.


길도 몰랐다. 교통 흐름도 몰랐다. 내비게이션이 고장 났다는 사실에 평정심을 잃고 당황해 표지판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몰랐으며 심지어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봐야 할 방향이 어느 쪽인지조차 몰랐다. 한 마디로, 길잡이 없는 도심에서의 나는 완전한 천둥벌거숭이였던 것이다.


팔각정 사건 이후, 운전대를 잡은 나의 모든 것이 변했다.


초행길에 오를 때에는 인터넷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최선의 경로, 차선의 경로, 우회 경로를 각각 미리 공부했다. 아무리 그래도 초행길인지라 내비게이션은 켜 두고 달리지만, 주행하는 내내 항상 여러 루트를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그리고 무사히 왕복을 마치면 그 목적지에 두 번 다시 내비게이션을 켜고 가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두 번째 왕래에 헤매는 일이 잦아졌지만 올바른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일단락되곤 했다.


세 번째부터는 완전히 내 길이었다.

일부러 차선 경로, 우회로를 이용해 보기도 하고 샛길이나 지름길을 찾아 나서는 모험도 감행했다. 다소 헤매도 안전권역을 벗어나지 않을 자신이 생긴 덕분이었다. 이때부터는 그 목적지를 향하는 길 자체가 하나의 즐거운 여행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알지 못했던 세계를 경험하고 마음 속에 기록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내면의 지도가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어떤 목적지를 향하는 길에 잘못 들거나 헤매면서 누비던 골목들이 훗날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떠오르는 지름길로 등장해 구원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이는 마치 전날 헤맨 적 없는 자가 훗날 헤맬 때 길을 쉽게 찾지 못하며, 전날 헤맨 자가 훗날 길을 쉽게 찾는 이치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표현한 바와는 별개로 나는 내비게이션(길도우미) 장치가 두말할 나위 없이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상 생활에서 길을 손쉽고 빠르게 찾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가,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배들을 인도하는 장치가, 조난된 등산객이나 모험가의 수많은 목숨을 구하는 장치를 두고 감사를 표할지언정 무가치하다는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다. 나 역시도 그로부터 큰 도움을 얻고 살아가는 수혜자 중 하나이므로.


다만 한 가지 짚고 싶다. 그러한 장치가 제공하는 편리함과 정확성을 선호하는 과정에서 경험과 고민, 방황을 물감 삼아 우리 내면에 그려지던 세상의 지도가 점차 희미해져 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이 내면의 지도란 어쩌면 우리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인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부자연스럽기 그지 없다. 인생엔 그 어디에도 내비게이션이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방 500m에서 좌회전, 3km 뒤에 출구로 진입, 시속 70km 유지' 따위를 알려주는 친절한 장치는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 땀 흘리고, 피 흘리고, 눈물을 쏟은 다음 그제야 '이 길이 아니었구나'하고 몸소 깨닫는 것이 삶이라면, 도로 위의 내비게이션은 지나치게 달콤한 감이 있다.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일부러 골목길이나 가본 적이 없는 길로 무작정 차를 끌고 들어가거나 발걸음을 옮겨 본다. 지금의 이 호기심과 무심해 보이는 잠깐의 난센스가 훗날 어떤 완벽하고 아름다운 샛길, 혹은 지름길을 선사할지 모르는 법이기에. 그리고 내 안에 자리 잡은 세상의 지도가 그 부족한 부분을 조금 더 메우고 약간 더 포용력 있게 세상을 삼아낼 수 있도록. 팔각정에 도착한 날, 많은 차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대신 나름대로 기억을 되살려 길을 찾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린 나 자신의 어리석은 결정에 감사한다. 만일 그들을 따라갔다면 그날 찾아 헤매던 길은 발견했을지언정 내 안의, 그리고 내 인생의 지도에 이르는 길은 놓쳐버렸을 것이기에.


"I see my path, but I don't know where it leads. Not knowing where I'm going is what inspires me to travel it."


"걷고 있는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알 수 없음이 바로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 Rosalia de Castro,






커버 이미지 : Pol Ledent 作

삽화 (순서대로) :

1 - Wayne Thiebaud 作

2 - Martin Dorsch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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