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 turning point,
어느 가을이었다.
한 수업의 수강을 마치고 다음 강의에 참석하기 위해 건물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수업이 평소보다 늦게 끝난 데다가 다음 강의가 열리는 건물까지의 거리가 상당했다. 출석이 인정되는 시간 안에 도착하려면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달려야만 했다. 어쩔 도리 없이 주섬주섬 책을 챙겨 무거운 배낭을 낑낑거리며 어깨에 얹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기에 일곱 층을 단숨에 달려내려갔다. 건물 현관을 나선 뒤에도 달리고 또 달렸다. 한창 학기가 무르익은 캠퍼스에서는 강의 시간 사이마다 전력으로 달려가는 주자들이 흔히 보였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는 동족들을 보며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이상할 정도로 맑았던 날씨를 기억한다. 헐떡거리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날씨 참 좋네. 다행히 지금 바로 들어가면 출석이 인정되겠군.'
가쁜 숨을 고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건물 정면의 현관으로 이어지는 층계참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머리채를 잡은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정지했다. 동작을 멈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가 불러 세운 것도 아니었다. 이어 뇌리에 물음표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도대체 왜?'
이는 눈 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나는 이토록 힘들게 뛰었지?'
'도대체 왜 나는 출석 인정을 받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고 있는 거지?'
'도대체 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거지?'
'도대체 왜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갑자기 바보처럼, 마치 인형인 듯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다른 누군가가 나의 할 일을 정하고, 움직일 시간을 정하고, 속도를 정하고, 마음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사회에, 제도에, 세상에 책임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에 발맞추어 움직인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건물 앞에 조성된 화단 잔디 위에 배낭을 던져 놓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날씨가 좋았다.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가을 바람도 살랑거렸다. 그대로 볕을 쪼이며 내가 '참석해야만 한다고 여겼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약 50분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나보다 늦게 도착한 학우들이 헐레벌떡 건물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온전한 나 자신의 의사와 결정으로 얻어낸 50분을 보낼 수 있었다.
매일 지나다니던 과 건물 앞 화단에 어떤 모양을 한 조형물이 있고, 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으며, 돌들이 어떤 모습으로 놓여 있는지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이는 인생 최고의 순간들 중 하나였다.
흔히 인생이라는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극적인 장면의 연속이나 장대한 연대기와 같은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미술품으로 치자면 걸작, 명작, 최소한 수작으로 분류되는 일종의 완성형 그림이다. 다만 피부로 맞닿아 있는 현실은 그러한 완성품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시대적으로 영웅물에 익숙한 탓도 있을 것이며, '기·승·전·결' 원칙이 철저히 적용된 플롯을 쉽게 접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 자본주의, 인간의 이성 등 장황한 이유를 들자면 끝도 없겠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언젠가부터 정연한 논리 체계가 적용될 수 없거나 시·공간적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을 쉽게 납득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해야만 하는 일', 혹은 '당연한 일'로 삶이 가득 차 버린다는 현상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현실·공상 여하를 막론하고 삶에서 절대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란 정해져 있지 않다. 자신의 삶 속에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어떠한 강박이 있다면 그것은 (자의건 타의건) 자신이 그렇다고 규정한 까닭이다. 당연한 일이라는 것 역시 가장 당위성 있고 발생 가능성이 높은 길을 의미할 뿐, 앞으로 일어날 일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정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그럴 것이므로 이렇게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현대적인 사고방식은 마치 알 수 없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모습에 질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음표가 들어 있는 빈 칸에 불편함을 느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수식으로, 타인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형태로 억지스럽게 채워 넣는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