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ssian Dec 28. 2022

늑대가 나타났다

거짓말쟁이들의 마을 - 9


숲에서 평원으로 들어선 다음 짙푸른 겨울 철새들이 날아 오르는 방향과 해가 떠오르는 방향의 가운데 즈음으로 나아가면 가수야, 이른바 거짓말쟁이들의 마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기억한다.  나는 심술을 부려 가수야 방향을 피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목소리가 마치 계시처럼 주어져 길을 가리키고 인도한다 하여 이를 맹목적으로 따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현재 늑대 무리는 겨울 철새들이 향하는 방향으로부터 나를 쫓아오고 있다. 따라서 늑대 무리에 따라 잡히지 않고 가수야로부터 확실히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해가 저무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붉은 하늘을 향해 걷다가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걷는 시간이 늘 기다려졌다. 마지막 붉은빛마저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면 앞서가던 하얀 바람이 몸을 돌려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얀 바람은 그저 길 앞쪽에 먼저 나아가 있을 뿐이었지만 때로는 하루종일 나를 인도하던 길잡이가 휴식을 취하러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둠이 내리 깔리니 나를 늑대 무리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부러 복귀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고 싶었다.


여느 날보다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포근하고 촉촉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얼마나 걸어왔는지  돌이켜 보니 평원을 걷기 시작한 이후 열 번의 밤이 지나갔다. 오늘은 여로를 바꾼 뒤 맞이한 네 번째 밤이었다. 곁에는 하얀 바람이 조용히 눈을 감고 엎드려 있었다. 모닥불은 이른 새벽에도 약간의 열기를 머금을 수 있도록 알맞게 타올랐다. 이 여정은 무엇 하나 뚜렷하거나 정해진 것이 없으며, 결코 안심할 만한 단계나 상황도 아니다. 그럼에도 어쩐지 평화롭다는 느낌이 든다.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던 대기는 눈송이를 한껏 머금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을 뜨니 주위가 온통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드넓은 평원 위에 또다시 백색의 평원이 펼쳐진 듯한 풍경이었다. 모닥불에는 아직 주홍빛 재가 열기를 머금은 채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얀 바람이 엎드려 휴식을 취하던 자리에도 눈이 뒤덮였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정도로 흔적이 희미한 것으로 보아 늑대는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뜬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미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조금 뒤면 자신이 적정 거리라 여기는 지점에 멈추어 서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겪기 드문 평원에서의 하얀 여정길을 만끽하며 부지런히 걷겠노라 다짐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모닥불 주변의 모양새가 어딘가 이상했다. 모닥불 주위로 셀 수도 없는 늑대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혀 있었다. 깊은 밤에 접어들면 하얀 바람은 어김없이 모닥불 맞은 편에 누워 불을 들여다보며 휴식을 취했다. 수많은 늑대 발자국들이 혼돈스럽게 찍혀 있었던 것은 바로 하얀 바람이 몸을 누이는 반대편이었다. 심지어 발자국들이 내가 누워 있던 자리 바로 머리맡 부근을 서성였음을 발견했다. 놀라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모닥불 주위에서 다른 어딘가로 이어지는 발자국은 일찌감치 길에 오른 하얀 바람의 발자취뿐이었다. 한참 동안 팔짱을 낀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얀 바람, 이 늑대는 대체 잠든 나의 머리맡에서 무얼 하는 것이며, 어째서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길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기에 이내 모닥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존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착각은 무언가에 대해 알고 있다 믿는 일이다.

나는 이 여정에 대해, 숲에 대해, 평원에 대해, 가수야에 대해, 늑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눈길에 발이 시리다. 시린 발에 뒷덜미가 떨린다. 떨리는 뒷덜미에 입술이 열린다. 입술 틈으로 평원의 차가운 눈바람이 스며든다. 입안으로 스며든 공기가 들숨이 되어 온몸을 관통할 때 우리는 평원의 기억, 때로는 바람이 불어온 땅의 이야기와 하나가 되곤 한다.


여러 가지 불안이 스며든 나머지 우선 노을이 지는 방향에서 밤마다 모닥불 셋 이상이 모이는 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다른 모닥불을 본 적은 없다. 다른 누군가와 합류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서로 봉화처럼 작용할 수 있는 거리에 모닥불을 피우고 휴식을 취한다면 조금이나마 늑대무리에 대한 견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는 공터에서 몸을 일으켜 [어느 나무와 나무 사이]를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가진 목표 의식이었다.


목표를 세우고 시선을 뿌옇고 먼 하늘에 고정하자마자 오늘의 발걸음을 멈추어야 할 사건이 발생했다.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앞서 가던 하얀 바람이 느닷없이 나타난 칠면조를 사냥해 물고 나타난 것이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에서 나뭇가지들을 모아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하얀 바람과의 축제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늑대가 나타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