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들의 마을 - 8
어지간해서는 더 오랜 시간 고민했을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되돌아갈지를 고민하며 주저했을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삶을 앞으로 내몬 것은 또다시 늑대였다. 다만 이번에는 그 숫자가 많고 움직임이 위협적이었을 따름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나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용기를 낸 것도, 대단한 결심을 한 것도 아닌 채, 스스로의 선택이 불러온 늑대들에 떠밀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가면을 쓰지 않은 대자연 속에서 힘이 부족하다거나 운이 나빴다는 등의 나약한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일반적인 살해와 포식이 일상인 땅에 며칠씩 주저앉아 사색은 물론 동기부여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건 서서히 진행되는 일종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곁의 늑대가 조용히 지켜보는 와중에 나는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를 소모하면서 막상 치열한 고민보다는 별다른 고심 없이 흘러가는 바람만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면 뒤로도, 앞으로도 나아가지 않는 상태 그 자체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뒤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계속해 버티는 이의 등을 두들기고 머리 위에 빛나는 별은 바라보는 이의 미간을 간질이며 손짓한다. 그럼에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움직임에서 파생되는 관성만큼이나 움직이지 않음에서 비롯하는 관성이 강력한 까닭이다. 움직이는 이들은 계속해 움직일 이유를 찾아내지만 움직이지 않는 이들 역시 필사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이유를 찾는 법이므로.
[가수야]라는 이름의 도시는 이른바 거짓말쟁이들의 마을로 불렸으며, 깊은 숲까지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들려온 목소리의 '거짓으로 진실을 전달하는 이들의 마을'이라면 달리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물론 거짓말쟁이들이 거짓으로 진실을 전달하려 애쓰는 부류인지는 알 수 없다. 소위 문명사회와의 접점이 거의 없었던 나는 갑작스레 문명 한복판으로 직행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평원을 걸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는 거지?
이에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었다. 향하던 방향이 가수야인지 혹은 이를 찾으려는 발걸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따르고 있음을 새삼 뒤늦게나마 인지했다.
평원 한가운데서 피우는 한밤중의 모닥불은 어쩐지 벌거벗은 느낌이 든다. 당장의 눈앞은 밝고 따스하지만 등 뒤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엄습하고 끝 모를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 펼쳐진다. 배회하는 포식자들의 발자국이 부드러운 흙에 끊임없이 찍히는 상상까지 더해지면 그날 밤은 거의 뜬 눈과 깜박이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수면만으로 동이 틀 때까지 버텨야 한다. 가끔은 등 뒤의 어둠으로부터 계속 도망치다가 눈앞에서 불타는 장작더미 위로 몸을 던지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충동도 든다.
애써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면 그날 들려온, 어쩌면 느껴졌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하얀 바람이라는 추론이다. 늑대 무리가 바싹 뒤를 쫓아오고 있었지만 그날 밤 목소리가 들릴 지척에는 타오르는 불꽃, 하얀 바람, 그리고 나뿐이었다. 심지어 목소리와 닿은 순간 하얀 바람과 나는 모닥불길을 가운데 두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실은 그 이후 늑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수 차례 말을 걸거나 목소리를 다시 들려주기를 부탁해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내 곁의 거대한 늑대는 대답 대신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마주 응시해왔다.
거짓말쟁이들의 마을로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것은
하얀 바람, 정녕 이 늑대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