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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Nov 08. 2023

산을 버리고 산을 택한 산악인,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서 지리산 정상을 향해 자동차로 10여분 갔을까. 왼쪽 산비탈에 마을 끝자락에 있는 집의 현판이 손님을 맞이한다. '백두대간(白頭大幹)'. 들어서니 아무도 없다. '분명 전화를 하고 왔는데 어딜 가셨나.' 툇마루에 걸터앉아 주인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집에는 쟁기가 걸려 있고 마당에는 작은 밭과 장독대 항아리가 있을 뿐이다. 실례를 무릅쓰고 부엌도 잠깐 들여다본다. 아궁이와 솥, 쌀을 담고 있는 듯한 항아리. 여느 시골집과 다르지 않다.

10분쯤 기다렸나. 문밖에서 누군가 걸어온다. 오늘의 주인공 남난희 씨(66)다. 황톳빛 몸빼 바지에 보라색 티셔츠.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 모습이다.


30년간 잊힌 산악인, 남난희


남 씨는 원래 산악인으로 유명했다. 1984년 백두대간을 처음 종주하고 1986년 여성 산악인으로는 처음으로 7455m의 히말라야 고봉 강가푸르나봉을 올랐다. 1989년에는 남성도 고개를 내젓는 설악산 토왕성 빙벽 폭포를 두 번이나 정복한 것도 그다. 물론 지금은 다 지나간 기억이 돼 버렸지만...

그는 두 번의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그 첫째가 국내 산악계를 떠나게 된 것이다. 남 씨는 국내 산악계에서 철저히 잊힌 채 살아왔다. 그 역시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담을 쌓고 지낸 지 30여 년. 이제는 스스로를 산악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산악인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실제로 산악인도 아니고요.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이유를 모르진 않는다. 단지 본인이 '비공개'를 원했기에 밝히지 않을 뿐이다. 힌트를 준다면 히말라야 여성원정대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다.

등반에 대한 회의도 일었다. 산을 좋아한다는 것이 '산악 등반'과 꼭 동의어일 필요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더 놓은 곳을 오르는 것도, 남들보다 빨리 먼저 올라가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서구에서 알피니즘이 도입되면서 높고 험한 산을 누가 더 빨리 올라가느냐가 중요해졌습니다. 정상을 정복하는 사람을 마치 영웅처럼 대하죠. 경쟁을 부추기는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체력에 맞지 않는 것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히말라야에 묻히게 되겠죠."

당연히 목표가 달라졌다. 남 씨는 더 이상 높은 곳을 추구하지 않는다. 등반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산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입산(入山)'했다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산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산이 파헤쳐지면 나 자신도 파헤쳐지는 것 같아요. 휴식하고 힐링하고 수행하는 곳이죠. 산은 모두 똑같습니다. 결국 마음의 문제지요. 내 마음속에는 100m 높이의 산이나 8000m 고봉이나 다를 게 없어요." 입산을 한다는 의미는 더 이상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뺏을 것도 없고 뺏길 것도 없다. 결국 모두가 모두의 것이 된다. 한마디로 "개인이 아닌 모두의 산"이라는 의미다.



세상 맛있는 된장을 그만둔 이유


산악인 말고 남 씨를 유명하게 한 것이 있다. '된장'이다. 누구한테 배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자급자족하는 삶을 위해서 시작한 것이 어느새 생계 수단이 돼 버렸다. 한번 만들면 10 가마니 정도 만들었다. 남 씨 표 된장은 전국구 스타였다. 어쩌다 방송을 탄 후에는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광주까지'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맛있다. 몇 년 전 우연히 직접 먹어본 적이 있다. 짜면서 짜지 않고 꿉꿉한 냄새 없이 구수함을 안겨준다. 찌개를 해도, 밥과 비벼도, 쌈을 싸 먹어도 잊을 수 없는 맛으로 다가온다. 일단 원재료가 뛰어나다. 콩은 강원도 정선콩만 쓴다. 여기에 5년 이상 묵힌 소금을 더한다. 구수한 맛이 뇌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맛있는 된장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법'이 필요하다. 남 씨의 비법은 자연이다. 지리산의 햇볕과 바람, 깨끗한 물이 그것이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 하지만 제가 만든 된장은 정말 맛있어요.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죠."

"저기 항아리에 된장이 있나요" 혹시나 하는 기대에 물었다. "거의 다 비어 있어요. 이제는 된장을 만들지 않습니다." "아~~" 실망감에 나도 모르게 한탄이 새어 나왔다.

된장을 그만둔 사정 속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서려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기범 씨.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다. 남편이 절로 들어간 후 아들에 대한 사랑은 더 깊어졌다. "힘이란 곧 앎인데, 앎이라는 것은 꼭 지식 공부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다. 많은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앎도 지식 공부 못지않단다. 너는 그동안 네 또래들에 비해서 지식 공부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들이 겪어 보지 못한 귀중한 체험을 참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너만의 길을 열어서 너다운 방향으로 너의 인생의 여행을 멋지게 하기 바란다." 2012년 2월 출간된 '아들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남 씨가 아들 기범 씨에게 남긴 글이다. 하나뿐인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절절이 느껴진다.

글처럼 '멋진 인생'의 기범 씨는 오지 않았다. 다시는 볼 수도 없다. 책이 나온 다음 해 친구와 부산에 내려갔다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열흘간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영영 남 씨의 곁을 떠났다. 금방이라도 엄마 하며 소리치고 들어올 것 같은데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니... 된장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처음 2년 대문을 걸어 잠그고 밤마다 통곡했다. 겨우 눈물을 거뒀지만 아들에 대한 얘기는 '금기어'가 돼 버렸다. 그렇게 지내길 7년. "3년 전부터 조금씩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얘기를 해도 괜찮아요. 어떤 때는 내가 먼저 아들 이야기를 꺼내기도 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는 대답이다.



가슴에 묻은 아들, 산이 위로하다


아들을 잃은 후 처음 시작한 것이 산을 다니는 것이었다. 영원한 이별을 한 후 대문을 걸어 잠근 채 일주일을 지나고 나니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눈앞에 들어온 것이 지리산. 대문을 열고 무작정 산으로 향했다. "그때 알았어요. 산이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나를 받아주었습니다. 산은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에게 산은 힐링과 위로의 장소다.

그래서일까. 남 씨는 산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산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산이 파헤쳐지면 자신도 파헤침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고마움도 느낀다. 위로를 받는 게 고맙고, 마음을 치유해 주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게 된다.

감사의 마음은 트레킹을 할 때 더욱 절절하다. 트레킹을 할 때는 항상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그만큼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모든 것이 고맙다는 생각은 더 커진다. 트레킹을 할 때 그는 매일을 아침 감사 기도를 하는 이유다. 같이 걷는 사람들, 주변에서 도와준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매일매일 소리 높여 부른다. 그 땅의 신에게, 그 길을 처음 만든 사람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매사에 감사하다 보면 순응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길에 순응하자.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만 힘들 뿐이다. 트레킹을 하면서 배운 것입니다."

산에서 배운 것이 어디 트레킹 때뿐일까. 남 씨는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비자본주의적 삶. 무전(無錢) 무소유의 삶이다. 형식을 버리면 내용은 더 충실해진다. "차를 마실 때 꼭 찻상이 필요한가요. 맨땅에서도 차는 마실 수 있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그렇게 사는 것을 저는 자연에서 배웠습니다." 남 씨에게 삶이란 자연 그 자체인 듯했다.


백두대간, 그 소중함을 위해


남난희 씨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6월. 스위스 알베르 1세 메모리얼 재단서 수여하는 '알베르 마운틴 어워드' 수상자가 되면서부터였다. 국내 산악계 전체가 의아해했다고 한다. '왜? 뭘 했는데?' 30년 동안 이름조차 희미했던 사람이기에 그럴 만도 하다. 그런 인물이 국내도 아닌 해외에서 상을 받는다니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어떻게 탔나고 물어보지를 않아요." 그의 말에 뼈가 들어있다.

남 씨가 상을 받은 이유는 그의 집 앞에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현판. 바로 그것이다. 백두대간에 대한 절절함은 스위스 베른의 스위스알프스박물관에서 열린 ‘알베르 마운틴 어워드’ 시상식에서 잘 드러난다. “백두대간을 걸을 때 남쪽 마지막 지점에서 철조망에 가로막혀 더 갈 수 없었습니다. 절망하고 울었습니다. 38년이 흘렀습니다. 누구도 길을 뚫어주지 않았고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간절히 바랍니다. 백두대간을 이어 백두산까지 걸어가길….”

그가 왜 수상자가 됐을까. 해답은 가까운 데 있었다. ‘백두대간’이었다. 백두대간을 문화와 평화의 문제로 연결한 남 씨는 재단이 높이 평가한 것이다. 남 씨의 백두대간에 대한 애정은 뜨겁다. 백두대간에 대한 기고문을 해외에 냈을 때 번역자에게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이니 백두대간을 공부한 후 제대로 번역을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간곡히 부탁했을 정도다.

그에게 백두대간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 됨'에 있다.  “우리나라 산은 한 번의 끊김 없이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강 한 번 건너지 않고 모든 지역을 이동할 수 있죠. 나무뿌리처럼 남과 북, 우리 모두를 이어주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백두대간입니다.”

남 씨는 198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했다. 부산 금정산에서 강원 진부령까지 76일간 군사지도와 나침반만으로 길도 없는 산을 헤치고 나갔다. 거칠 것 없을 것 같던 발걸음은 남북을 가로막는 철조망 앞에서 막혔다. 산은 이어졌지만 길은 끊겼다. 절망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젊음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지만 언젠가 꼭 다시 와서 산줄기를 이어 완전한 백두대간을 걷겠다’는 다짐도 했다. 6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 그 희망이 가물가물해졌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남 씨는 3년 전부터 남북을 잇는 ‘백두대간 평화 트레일’을 추진하고 있다. 통일같이 거창한 꿈을 내세운 것이 아니다. 단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상을 받은 게 반가운 이유도 이러한 꿈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에서다.

“저는 너무 늙었습니다. 누군가 할 수 있도록 주춧돌이라고 놓고 싶었습니다. 상 하나 탔다고 당장 무엇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세계인이 함께하면 꿈을 가까이하는 데 조금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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