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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Jun 29. 2020

정상에 못 올랐어도 좋았을 날

아이와 제주 보름살이 다섯 번째 날 - 군산오름, 황우치해변

아이 도시락을 싸고 전화하니 윤이네는 벌써 쇠소깍에 가서 몸국을 먹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몸국이 간식이란다.

아, 여행은 저렇게 부지런하게 하는 것인가...

쇠소깍을 이미 다 돌고 나와 식사하는 줄로 알고 계획대로 군산오름에 가기로 했다.

상대방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과할 만큼 배려하는 윤이 엄마는 쇠소깍 앞에서 몸국만 먹고 다시 나왔단다.

아직 들어갔다고 얘기하지, 나도 거기 가봤는데.

소심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상황이 우습게 될 때가 더러 있다.

서로 생각이 많아서 결국 둘 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결정하게 되는.

윤이네와 만나면 우리는 가끔 그렇다.


군산오름 올라가는 길이 좁다고 해서

윤이네 차는 어디 한갓져 보이는 언덕 한쪽에 세워두고 우리 차에 다 같이 탔다.

윤이 외할머니가 아침부터 딸, 손주와 함께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는 초보운전 모험담을 들려주셨다.

차 안이 시끌시끌해지니 만사 귀찮은 곰이 표정도 조금 풀렸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 시간이었다.

차로 다 오르기는 했지만, 마지막 올라가는 계단이 꽤 길었다.

벌써 울기 시작하는 곰이를 업고 흡사 전장에 나가는 비장한 얼굴로 포대기 끈을 단단히 여몄다.

"아이고"를 서른 번쯤 한 것 같다.

앞서서 잘 올라가던 윤이도 삼분의 일쯤 오르자 현저히 속도가 줄더니

나머지는 거의 엄마에게 매달려서 올라갔다.

그래, 원래 엄마는 다 힘든 거야.


끝없이 이어질 것 같계단이 드디어 끊겼다.

와, 내가 애를 업고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기쁨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상에 오르면 좀 괜찮아질 줄 알았던 아이는 땅에 내려놓자 더 크게 울기 시작한다.

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한 본능일까,

곰이는 햇빛을 너무 싫어한다.

그러면서 모자도 안 쓰겠다고 난리난리.


군산오름에서 보는 남동쪽 바다, 뒤쪽에 산방산이 보인다.


뜨겁긴 하지만 날씨가 맑아서 전망이 사방으로 다 좋았다.

경치 좋은 걸 알면 애가 아니라 어른이지.

어차피 곰이는 봐도 큰 감흥이 없을 거라 혼자 변명하면서

다행히 하나 놓여있는 벤치에 앉혀 놓고 여기저기 돌아보며 사진을 찍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곰이를 쳐다봤지만,

그렇다고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괜찮아요, 엄마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여기서 내려가야 울음을 멈출 거예요.


군산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
군산오름에서 - 한라산에서 멀리 범섬이 보이는 해안까지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


다시 아이를 업고 포대기를 질끈 동여맸다.

죽기 아니면 살기지, 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라? 걸음이 가볍네?!

곰이를 등에 업고 있어서 무게중심이 맞는 걸까,

정말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갔다.

이후에 윤이 할머니는 여러 번 이야기하셨다.

아이 업고 땀 흘리며 올라갈 땐 같이 가자고 한 게 말할 수 없이 미안했는데,

가볍게 내려가는 걸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른다고.

"우리랑 잘 왔죠?" 하시며 소녀처럼 웃으셨다.

웃는 얼굴만큼 마음이 너무나 어여쁘신 어른이었다.


꼬마들도 있고 가는 길목이기도 해서 단비식당으로 안내했다.

어느 집을 추천해도 다 맛있고 좋다고 할 분들이었지만

짧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하는 일행을 끌고 여기저기 모험하는 망설여졌다.

여러 유명한 곳을 검색해두고 짜임새 있게 여행하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하고.

식사를 하고 황우치해변에 갔다.

황우치해변은 그날 유독 바람이 강했지만,

익숙함을 좋아하는 곰이는 형아 누나 없이도 모래밭에서 잘 놀았다.



그리고 하루치 일정을 다 소화한 저질체력 모자는 귀가했다.

윤이네는 거기서 천지연을 들렀다가 매일올레시장에서 우리 먹을거리까지 사다 나누어주고 갔다.

어르신들의 여행 코스가 꽤 빡빡한 건 알고 있었지만

윤이가 정말 대단했다.

우리 집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이가 그랬으면 나는 초주검이다.

역시 내 아들이야. ^^;;


해가 기울어가는 중산간로를 다 달리고 엄마가 장까지 봐오는 동안 곰이는 깊이 잤다.

맛나게 저녁을 먹고 좋아하는 호비 책을 넘기며 잘 놀았다.

이제 여행을 즐길 컨디션이 됐구나, 너도 나도.

흥얼흥얼 가사 없는 노래를 하는 곰이 옆에 앉아

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맥주캔을 땄다.


걸어 올라간 거리는 새별오름이 더 길었는데

뭐지, 이 알 수 없는 뿌듯함은.

정상에 닿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일까.

아니야 오늘 경치가 좋긴 좋았어.

과정의 소중함, 우리가 있는 그 자리 그 순간이 주는 기쁨에 만족하면서 여행하는 게 좋다며?!

음, 그래도 앞으로는 최대한 가보는 게 좋겠어.

이만하면 됐어, 좋아. 하고 돌아선 바로 그다음 길에

깜짝 놀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그러고도 우리가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짚어 나온 곳은 많았다.

여행에서 고생은 곧 추억이라지만

아이를 혼자서 책임지고 있는 엄마는 단호하게 고생을 선택하기 어려웠음을, 괜히 혼자 호소해본다.

그럼에도 아이와 함께 돌아 나오던 산굼부리, 사려니숲길, 녹차밭 길은 들어갈 때와 또 다른 추억이 되었다.

내가 불러준 노래가 다르고, 아이의 표정이 다르고, 해와 바람이 달랐으므로.

사진에 담지 못한 그것들을 나는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아쉬운 건 내 모자란 기억력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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