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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Oct 23. 2020

장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길

나 스스로를 다스리며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고 지난한 과정.

아이와 일주일짜리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원래는 오랜 친구들과 그 아이들의 마지막일지 모를 제주 모임이었기에 특별히 일정을 미리 짜 두지 않고 그저 짐만 최소한으로 싸서 떠난 무계획 여행이었다.

보통 짧게라도 여행을 다녀오면 가슴에 켜켜이 쌓여있던 먼지를 덜어낸 듯한 기분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덜어낸 만큼 새로 담아온 것 같은 답답함이 남았다.


한두 달 전부터 나는 좀 예민하고 공허한 상태였다.

무언가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책을 읽지만 글자를 하나씩 넘기고만 있을 뿐

간단한 메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너무 여유만만해서 나까지 신호를 놓치게 한 앞 차를 밀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당장 내려서 무리하게 끼어들기한 저 차 운전자의 멱살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식사와 소변을 거부부터 하고 보는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싶은 기분이었고,

평소에 웃으며 지나가 주던 아이 고집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화를 냈다.

좋은 날씨에 기분 전환이라도 하자며 아이와 둘이 교외로 나가는 고속도로를 탔는데,

이대로 큰 사고가 나서 아이와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한 게 처음은 아니다.


몇 년 전 아이의 장애 진단을 받고 복지카드의 존재로 그 진단의 공신력을 확인한 후

그 어린것을 차에 태워 늦은 저녁, 주말을 가리지 않고 상담과 치료를 다니러 미친년처럼 쫓아다닐 때 나는 사실 내가 뭘 해야 할지를 몰랐다.

너무 바빴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가진 장애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로 나는 이미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나는 그때 매일 밤 혼자가 되면, 아이와 둘이 어떻게 죽을까를 계획했다.

조용히,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하지만 확실하게 한 번에,

죽을 수 있을지대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고민했다.

옳고 그름을 논하는 건 사치였다.

엄마가 먼저 힘내야 한다고,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한 거라는 밝고 긍정적인 격려와 응원들은

말기암 환자에게 죽을 고통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말하는 무성의한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길에서 지나가는 아이의 재잘대는 소리만 들어도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이 터졌다.

살면서 흘리게 될 눈물도, 가슴 아플 일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질 텐데

나는 표면적인 이벤트가 없어도 주기적으로 통곡을 했다.

그걸 끝낼 방법은 나와 아이가 함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주 느리기는 하지만 아이도 단순하게나마 자기표현을 할 줄 알 만큼 컸고,

나는 이제 내가 아이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저 아이가 하루라도 더 편안하려면 그 옆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턱없이 짧은 발달장애인들의 평균 수명에 대하여 알게 된 이후로,

어쩔 수 없이 나는 아주 가끔 아이와 나의 끝에 대하여 생각한다.

저 아이를 세상에 남겨두고 나는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반대로 아이를 먼저 보내고 나는 여기 남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기에,

나와 아이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겠기에

대부분의 일상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직도 두 돌 근처를 천천히 지나고 있는 아이의 하는 짓은 너무나 어여쁘고,

느린 아이 덕분에 나는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을 충분히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러니 괜찮다. 좋다. 행복하다. 너도 좋지 곰아?


휴직이 길어져 불안해진 탓인지,

이 생활에 익숙해져 여유가 생긴 탓인지,

다시 마음이 울렁거린다.


아이가 크면서 남다름은 더 두드러져 가고

순간순간 체력과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다.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더 공포스럽고

아무리 애를 써도 웃어지지가 않는데,

아이는 너무나 예민하다.


그래도 지나가겠지.

그래, 어느 인생에도 짐은 있다.

내 짐은 왜 이렇냐고 억울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바꾸어질 수가 없는데.

그저 가을을 타는 것이기를.

겨울이 오면 나도 더 차고 단단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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