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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Apr 30. 2021

아이가 만들어 준 홀로 여행 하루

아이와의 제주 보름살이 아홉 번째 날 - 중문~강정~외돌개 해안 드라이브

제주 숙소 마당 안쪽에서


애 모기 물렸다고 병원 데려가는 엄마가 누군가 했더니.


오 마이 갓.

내 아들 얼굴을 누가 때린 거지?!

와, 이건 누가 봐도 한 대 맞은 얼굴인데.

모기 물린 거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얼굴 한쪽이 다 부어올랐다.

병원에 가자.


곰이가 더 어릴 때 이렇게 모기 물린 일로 인해 대학병원에까지 갔던 적이 있다.

처음 모기 물린 곳을 아이가 긁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점점 주변으로 번져서 며칠 만에 온몸이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벌긋벌긋해졌다.

원래 아토피가 있는 아이라 열심히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봤지만 소용없었다.

알레르기인가, 알레르기 약을 처방받으러 소아과에 갔더니 대학병원에 가란다.

진단은 자가 면역에 의한 이드 반응(Id reaction), 알러지성 과잉 반응이란다.

포진 약을 먹어야 나으니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의원에 가서 진단과 처방 경험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감기 때문에 갔던 소아과에 다시 데리고 갔다.

얼굴을 보여주고 이드 반응 이야기를 했다.

의사는 아직 그렇게까지 보기는 어렵다며

긁고 만져서 자꾸 번지는 거라고, 일단은 손을 못 대게 하라신다.

약국에 가서 밴드를 종류별로 여럿 샀다.


만지면 안 돼.

떼면 안 돼.

손대지 마!

일주일 동안 아이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가뜩이나 소통이 잘 안 되는 아이가 말을 곧이들을 리 없다.

떼면 붙이고, 돌아서면 또 떨어져 없고, 다시 붙이고,

무진장 많은 밴드를 갈아붙였다.

사나흘쯤 지나면서 붓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명의였네.


병원에 다녀오니 예고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당에 널어두었던 빨래를 걷어 거실에 다시 널고,

간단히 청소를 하고,

이렇게 숙소에만 있기는 아까우니 어디라도 가자.

박물관들이 모여 있는 중문에나 가자며 차를 몰았다.


해안도로 없는 해안을 따라 달리며 혼자 기분 내기


테디베어 박물관 앞에 도착했지만, 도중에 아이는 잠들어버렸다.

아직 다섯 살이었으니, 오후 두세 시가 넘어 차를 타면 아이가 언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다.

비는 내리고, 아이는 잠들었고, 나는 중문을 잘 몰랐다.

해안 따라 드라이브나 해볼까.

월평포구 쪽으로 달리는데 눈 앞에 무지개가 나타나 계속 길 안내를 했다.

캬, 좋다.


마침 배도 고프다.

강정포구를 지나 유명하다는 김만복 김밥과 아메리카노를 사고 해안가로 나가 차를 세웠다.

김밥 맛은 뭐, 제주 온 기념으로 한 번 먹어보는 거지.

김밥 한 줄 먹는데 차창 밖 뷰는 호텔 라운지 부럽지 않다.

원래 비싼 음식은 눈으로 먹는 거지, 암.


강정에서 법환으로 넘어가는 올레길 7코스 해안가에서. 범섬이 보인다.


비가 그치고 해도 나왔지만, 아이는 계속 잔다.

지난밤 잠을 잘 못 잤구나.

실컷 자라, 엄마는 드라이브 계속할게.


법환포구 쪽을 지나 외돌개가 나왔다.

원래 차가 많은 곳인데, 비 오는 월요일 도로는 한산했다.

창문을 약간 내려놓고 차에서 내렸다.

아, 저게 문섬이구나.

해안 쪽으로 좀 더 내려가 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이제 아이가 언제 잠에서 깰지 모른다.


외돌개휴게소 쪽에서 내려다보는 문섬



그러고 보니 오후 내내 꼭 혼자서 여행 것처럼 돌아다녔다.

비 그친 후의 물 먹은 공기를 한껏 마시고 다시 차에 올랐다.

부스스 아이가 잠에서 깬다.

"잘 잤어? 여기는 외돌개야. 비도 그쳤어. 우리 이제 장 보러 가자."

아이가 일어나다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한다.


말없이 조용한 아이는 늘 내 뒷좌석에 앉아 룸미러를 통해 나를 쳐다보며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린이집이나 치료실에 갈 때에는 얼굴을 찌푸리거나 반가워하기도 하고,

긴 시간 달리며 여행을 갈 때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율동을 하기도 하고,

가끔 에~, 으음~, 이~, 아파(아빠) 추임새를 넣으며 리액션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가만히 내 말을 듣기만 한다.


가끔 쉬할래? 주스 마실래? 물으면서 도중에 차를 세워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나

나 스스로 아이로 인한 우울감에 빠져있을 때에는 대답 없는 아이가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보통 나는 말할 줄 모르는 아이를 태우고 다닌다는 사실을 잊는다.

뒤에서 나를 바라봐주는 아이의 존재는 늘 든든하고, 우리는 큰 불편 없이 대화를 나눈다.

특히 여행 중에는 더욱 그렇다.


남다르게 예민한 어린 아들과 둘이 다니려면 고려해야 할 게 많다.

식당이나 카페도 아무 데나 내키는 대로 갈 수 없고,

계단이 많거나 우산을 오래 써야 하는 곳은 제외해야 한다.

실내가 많이 복잡하거나 시끄럽거나 더운 곳은 탈락,

바람 좋은 야외를 좋아하지만 비가 와도, 햇빛이 강해도, 공기가 탁해도 모두 불합격이다.

아이가 먹거나 움직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리니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나 장소를 피해 다녀야 한다.

그 모든 걸 여행을 다니기 전에 모두 검색해서 동선을 짜 놓고 가능한 대안까지 마련해두면 좋겠지만,

대통령 의전비서가 아닌 엄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이를 뒤에 태워두고 혼자 떠들며 검색하는 시간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럴 때 곰이는 카시트에 앉아 나를 보며 어딜 가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한다.

이 까다롭고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나의 VIP는 결코 내 의전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그를 만족시키고 싶은 욕심에, 내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기 위해 유난을 떨 뿐.


준비도 평가도 모두 나 혼자 유난 떠는 아들과의 여행은 그래서 늘 성공적이다.

아이는 내 안내를 받아 어디든 기꺼이 즐겨줄 준비가 되어있고,

나는 긴 여정 속에서 찰나라도 아들이 웃어주면 성공적인 여행이라며 과장되게 기뻐한다.

아이를 태우고 나는 기민하게 움직이지만,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늘 만족스러운 여행을 한다.

그래서 이 가을 제주에서의 보름을 보낸 이후 내 여행 준비과정은 점점 대충이 되었다.

은 건가? 모르겠네.


시간이 흐르고 이때보다 지금 훨씬 더 편해진 게 하나 있다.

"주스 마실래?" 하고 물으면 곰이가 손으로

"오케이" 또는 "엑스"를 만들어 의사표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곰이를 만나기 전의 나는 예, 아니오의 의사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한 소통의 표현줄을 몰랐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나는 사실 예, 아니오를 확실히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메뉴를 고르는 것도 항상 타인에게 미뤘었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상대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일 수 있다는 걸 제대로 배운 셈이다.

그걸 알게 돼서, 이제 곰이도 알게 된 것 같아서,

너무너무 너어무 좋다.


차에서 자고 일어나더니 아들이 갑자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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