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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May 08. 2021

바보, 노력한다고 행복해지냐.

아이가 와서 알려줬다. 엄마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

바쁘게 크고 있는데, 나도 이렇게 숨이 찬데, 그런데 이게 느리다고?!


곰이의 장애 진단서를 받아 들고 아이 아빠와 나는 오랫동안 슬펐다.

화가 났고, 원망스러웠고, 억울했으며,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런 불행이 닥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미칠 것 같았다.


남편은 나와 번갈아 연차를 쓰며 멀리까지 여러 번 대학병원에 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못마땅해했었다.

"도대체 우리 애가 왜 이런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거야?"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얼마 후 검사 결과를 듣고 진료실에서 나오며 "저 의사 돌파리 아냐?"라고도 했다.

말 한마디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 대신 부모와의 면담만으로 이루어진 여러 검사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것으로 우리는 한동안 현실을 부정했다.

그래도 뭐든 해야 하니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아이를 보여주고, 이 어린 걸 데리고 들어가서 도통 뭐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는 그 "재활치료"를 하러 다니며 우리의 생활과 머릿속은 점점 번잡하고 피폐해졌다.


그래도

세 돌도 안 된 아이를 일찍부터 '치료'하러 다니고 있으니 분명 좋아질 거라고 확신했다.

누구도 아이가 언제부터 말할 거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말도 곧 할 거라고 믿었다.

아이와의 긴 분투를 마치고 복직할 때에는 최소한 장애 진단만은 없애고 말리라 굳게 다짐도 했다.


1년이 지나갔다.

자폐 스펙트럼의 징후들이 아이한테서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거리의 모든 하수구 속과 표지판 앞뒷면을 꼼꼼히 들여다봐야 발걸음을 옮겼다.

뜻도 모르는 숫자, 알파벳, 기호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까치발로 다니기도 하고, 블록은 쌓지 않고 줄을 세웠으며, 사물을 특이한 방법으로 관찰했다.

거실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걸 보고 있자면 내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의사는 아직 자폐는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알아버렸다.

아이를 재우고 밤마다 울었다.

이 휴직은 아이를 "치료"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정"하는 여정이 되겠구나, 생각하니 통곡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2년이 지났다.

아이는 조금 커서 치료에 익숙해지고 체력도 나아졌지만 그놈의 코로나로 복지관은 수시로 문을 닫고 어린이집은 휴원 했다. 치료방식을 바꿔볼까 계획했던 것들은 수포로 돌아갔고, 여행도 산책도 눈치를 보며 다녀야 했다.

그 사이 아이는 집 바깥에서 하는 모든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어린이집 생활을 까맣게 잊었다.

옹알이가 올라오다 다시 잦아들었을 뿐 여전히 입은 굳게 닫혀 있고, 바디랭귀지만 몇 개 늘었다.

기저귀는 안 하지만 배변 문제를 해결한 건 아닌 애매한 상태로 일곱 살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장애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남의 일 같던 사회면 뉴스에 눈물이 나고, 관심 없던 정부 정책에 열불이 났다.

이따금씩 아이들 엄마인 친구들과 만나거나 통화하는 일이 꺼려졌고, 즐겨 보던 TV 육아 프로그램이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책도, 유튜브도, 인터넷 글도, 내 아이와 관련 있는 것들이라야 집중이 됐다.



곰이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나는 내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부부는 이제 마주 앉아 본질적인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아들이 장애 아이라서 슬픈 이유가 뭘까, 그게 곰이의 불행인가, 아니면 부모인 우리가 스스로 불쌍해서 그런 것인가... 하는 이야기.


우리 부부는 둘 다 원하는 걸 노력해서 얻는 것에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원하지는 않아서 말았다면 모를까,

이뤄야겠다고 생각하면 독하게 매달리는 성격이었고,

끝내 실패로 포기해본 적은 없었다.

자라면서 넉넉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어 독립한 지금 크게 부족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이제 남은 하나, 원하던 아이를 어렵게 가졌을 때,

우리 자신은 몰랐지만 아마도 오만의 절정에 있었을 테지.

"원하고,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인생은 공평하다." 그러면서.


하지만 삶은 공평하지 않다.

간절히 원하고 죽도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세상에는 너무나 많고,

모든 존재가 삶과 동시에 던져진 불공평함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살아간다.

바닷속 몸집 작은 물고기들은 태어나 다 자라기도 전에 더 큰 존재들에게 잡아먹혀 생을 마감하지만, 그건 자연이라는 커다란 시스템을 유지하는 먹이사슬의 섭리일 뿐이다.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학대에 시달리다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어도 그를 되살릴 방법은 없다.

내전과 기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나라에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운이라는 말로 퉁칠 뿐, 존재에게 주어지는 삶의 여건은 완벽하게 불공평하다.

그걸 어른들은 "팔자"라고 부른다.

아이고, 내 팔자야. ㅋ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삶이 내게 주어지는 거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그렇게 팔자려니 하면서 살면 될걸 우리는 왜 이렇게 억울하고 슬픈가.

곰이가 앞으로 겪게 될 불이익과 불행 때문에?


우리가 무슨 고위층, 고소득, 그런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똑똑하고, 성실하고, 돈도 필요한 만큼 안정적으로 벌 수 있고, 건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 행복하다.

그러면 좋겠는데.

과연?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자랄 수 없었기에 결핍을 스스로 채우기 위해 꽤 많이 노력하며 살아왔고,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몸뚱이를 움직여야 하는 피고용인들일 뿐이다.

아프면 기어서라도 학교에 가야 한다기에 죽기 살기로 12년 개근을 했던 것처럼, 회사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업무에 지장을 주는 건 결코 할 수 없는 어리석은 개미들이다.

젊어 고생을 사서 하지도 않고 그저 피할 수 없는 고생만 했는데도 젊음이 다 시들기도 전에 골병이 들었다.

부질없음을 알았으니 이제라도 헐렁하게 살아보자, 다짐한들 우리가 베짱이가 될 수 있을까.


"아주 잘 커준 잘난 자식으로 사는 당신은, 그래서 행복해?"

남편이 내게 물었다.

"글쎄, 별로. 계속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 재미없어. 힘들기만 하고."

남편도 그렇다고 했다.

결국 잘난 자식이라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이 아니라 부모님이었다.


맞다.

아들이 꽤 그럴듯한 사회인으로 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아이의 행복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애한테 원하는 게 뭘까? 잘난 어른으로 커주는 것? 아니면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

그건 말로 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혹시

부모로서 가지는 아이에 대한 기대와 희망, 미래의 행복감을 일찍부터 일정 부분 내려놓아야 하는 데서 오는 자기 연민이 아닐까.

백 프로는 아니지만 뼈를 때렸다.


어떻게 하면 곰이가 더 많이, 더 길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그걸 고민하기로 하자.

우리의 행복은 스스로에게서 찾기로 하고.

결론은 그랬다.



나와 내 아이의 행복 모두를 원하지만,

행복도 불행도 아닌 지금을 산다.


말로 하는 결론은 아름답다.

그러나 늘 그렇듯 현실은 말처럼 아름답지 않다.


못난 자식으로 커도 괜찮으니 너만 행복하면 나도 좋다.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만, 방법론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은 쪽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함정.

도대체 어떻게 해주어야 이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거란 예측을 하며 먼저 눈감을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자립을 위해 신변처리 훈련은 꼭 해야 하고,

그렇게나 좋아하는 애착 이불과도 떼어놓아야 한다.

시간에 쫓기며 아이를 닦달하자니 소리를 지르기 일쑤이고, 아이와의 육탄전에 심신이 다 지쳐버리곤 한다.

그러면 별 수 없이 나는 슬퍼진다.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덜 착한 딸로 살걸.

어쩐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울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걸까?


일곱 살이 되어서야 율동을 시작한 아이의 어설픈 몸짓은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다.

크레용 하나 제대로 쥘 줄 모르는 아이가 어린이집 사생대회에서 우수상을 타 오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면 민망하면서도 좋기는 하다.

여느 아이라면 2년 전에 했을 법한 것들을 그래도 컸다고 보여주는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고 기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가?


아이에게 장애가 있어서,

힘들고 슬픈 날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아이 때문은 아니다.

내 자기 연민 때문이기도 하고,

소수자의 불편에 무관심하고 그 불편을 바라보기 불편해하는 이기적인 다수자와,

다수의 편리에만 지나치게 맞춰져 있는 시스템 탓이다.


힘들고 슬프면 그냥 울자.

억울하면 욕하고.

바꿀 수 있는 거라면 이야기도 하고.


아이의 행복도 예단하지 말자.

행복은 본인이 평가하는 거다.

다만 내 행복감에 너를 맞춰달라고 떼는 쓰지 않을게.


어쩌면 행복이라는 것도 실체 없이 떠도는 그저 말일 뿐.

불공평하게도 소수자 쪽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내 아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크게 생각하지 않고, 공평한지 불공평한지 크게 따지지 않고 살아도 되는 팔자였으면.

어차피 세상은 끝없이 불공평함을 던지겠지만, 그 무심함에 맞아 죽지만 않는다면야.


남은 건 기도밖에 없구나.

부디 너에게 운이 따르기를.

엄마는 종교가 없으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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