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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Mar 09. 2021

만나면 반갑고 또 괴롭습니다

에니어그램과의 첫 만남

각종 성격유형 테스트와 심리상담 설문을 섭렵하던 시절이 있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마음의 꽈리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내 속마음에 집착했다. '나다운 게 뭔데?'처럼 오글거리는 대사를 스스로에게 던지며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려 애썼다. 남들에겐 별 것 아닌 일을 참을 수 없고, 화가 나면 눈물부터 흘리는 게 정상일까. 다행히 심리 공부는 마음의 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인싸로 살아가기는 어렵겠다 판단했고, 많은 것을 내려놓은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싶은 마음이 크다.


최근 복잡해하는 마음을 눈치챘는지, 가까운 지인이 새로운 심리 분석 도구인 에니어그램을 알려주었다. 정확히는 에니어그램을 사용하는 상담사분을 소개해주었다. 큰돈을 들여 상담센터를 다니거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을 정도로 힘든 건 아니라는 생각에 심리분석은 책으로만 배워왔는데, 웬일인지 이번 만남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돌파구를 찾을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꽤 먼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갔다. 따뜻한 인상의 상담사 분과 에니어그램 테스트를 바탕으로 2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니어그램은 총 9가지 유형으로 사람들의 성향을 유추하고, 주된 유형과 양 옆의 날개를 보며 성격을 설명한다. 한참 열풍이 불었던 MBTI처럼 테스트를 통해 사람의 성격을 나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분류보다는 원인과 이해에 초점을 두고 있어 풍성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장점이 있다. 상담 후에 알았지만, 에니어그램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도구다. 그래서인지 에니어그램 자체가 지향하는 바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든 면이 있다. 하지만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 중 하나로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테스트 결과, 나는 가장 분석하기 어려운 성향을 가진 것으로 나왔다. 불안이 높아 자신만의 성을 쌓고 견고히 하는데 힘을 쏟는 유형. 안전이 최우선의 가치이고, 뭐든지 열심히 하는데서 보람을 느끼는 충실가형. 의존적인 성격 역시 이 유형의 특징 중 하나였다. 다른 유형의 성격도 물론 가지고 있지만 충실가형의 특징이 가장 많았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힘들었던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친구를 너무 믿어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건넨 일, 스트레스를 받으면 갑자기 공격성이 높아졌던 경험, 커리어 우먼이 되려는 욕심이 내 성향과 반대되는 방향이었다는 사실까지. 굴비처럼 줄줄이 따라 올라오는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에 소름이 돋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왜 어려웠는지 알게 된 점이다.


친구들을 잔뜩 만나고 온 날에는 기쁨과 어려움이 휘몰아친다. 맘을 내려놓고 편하게 나눈 이야기와 웃음은 분명 큰 에너지를 선사하지만, 그 속에서 혹시 내가 실수한 건 없는지 걱정하는 것이 내 고질병 중 하나였다.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고 웃으며 헤어졌지만, 그 만남이 머릿속에서 리와인드될 때는 고통이 수반된다. 적당한 텀 없이 자주 만날 때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좋은 기분과 고통이 뒤섞인 상태에서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또 만났으니 속으로 스트레스가 쌓였던 거다. 풀리지 않는 불안과 경계 때문에 혼자 친구들을 오해하고, 그 오해가 번져 관계의 어려움으로 돌아왔던 것. 


만나면 반갑고도 괴로웠던 건 내 속에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 때문이었다. 안전을 위해 둘러둔 선이 오히려 독이 된 모양새랄까. 하지만 그런 성향은 타고난 것이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다만 그런 성향을 인정하고 다스리는 방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기에 더 괴로웠던 것이다.


엉킨 실을 풀어내려면 일단 실뭉치를 잡고 이리저리 둘러보아야 한다. 눈과 손으로 어디가 뭉쳤나 파악해야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풀어낼 수 있다. 이번에 만난 에니어그램을 통해 어쩐지 그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다. 내 안의 불안과 경계를 인정하며 드디어 나를 파악한 느낌. 아직 어떻게 알을 깨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차분히 나를 마주하고, 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면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심리 분석이 '나' 만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 '남'도 둘러보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당분간 꽤 열심히 에니어그램을 공부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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