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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Apr 21. 2021

그냥 막 써도 되는

엄마한테서 받은 봉투 한 장

마흔 이후 돈을 벌어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장녀로 자란 엄마는 책임감 없는 가장에 대한 혐오가 있다.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급격히 기운 가세로 어두운 학창시절을 보냈고, 돈은 없지만 정서적인 안정감만은 지켜주던 부모님께 차마 투정을 부리지 못했다. 당시로는 조금 늦은 결혼을 한 후에도 친정에 관한 부채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아흔에 가까운 외할머니에게 50년째 금전적인 도움을 드리고 있다. K장녀라는 말이 유행어 비슷하게 퍼졌을 때,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엄마가 떠올랐다.


흔하다면 흔한 이 스토리는 딸인 내게 반대로 영향을 끼쳤다. '너는 친정이 없는 것처럼 살았으면 좋겠어.' 결혼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대다수 부모들은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애쓰지만, 엄마는 부담 수준을 넘어 아예 거리감 있게 살기를 바랐다. 본인이 감당해야 했던 스트레스를 티끌만큼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다. 얼핏 정 없어 보이지만 엄마의 우울을 평생 지켜본 나는 그 말이 어떤 심정을 담고 있는지 이해한다.


실제로 8년의 결혼 생활 중 엄마가 집에 온 적은 딱 3번. 그동안 우리 부부가 이사한 횟수와 같다. 하룻밤 주무시고 간 적도 없다. 아직 아이가 없어서 일수도 있지만, 아이가 생겨도 글쎄. 오래 머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런 거리감이 엄마에게는 최선의 배려임을 알기에 서운함은 없다. 다만 여전히 그 굴레가 엄마를 휩싸고 있다는 사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이런 엄마에게서 며칠 전 봉투가 하나 왔다. 

'그냥 막 써도 되는 눈먼 돈'

하얀 봉투위에 익숙한 엄마의 필체. 맘대로 써도 되는 용돈이라는 뜻. 나이 마흔에 용돈을 받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이 문장을 또박또박 썼을 엄마가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자식들에게 받는 용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엄마에게 '막 써도 되는 눈먼 돈'은 여전히 환상 속의 존재다. 이 문장은 엄마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자 딸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테다. 어쩌면 칠십이 가깝도록 해 본 적 없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을지도.


자주 보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니다. 말과는 다르게 종종 식재료를 집으로 보내시고 소소한 일로 통화를 하기도 한다. 친구들에게 전해 듣는 모녀 관계에 비하면 연락 횟수가 적지만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사랑은 부족함이 없다.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랐고, 금전적 도움 역시 컸다. 전보다는 자주 외갓집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에 이제는 내가 엄마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드릴 시간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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