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틀렸죠
사실은 작년 여성의 날을 맞아 쓰려고 했던 글이었는데, 생각만 하고 조금 끄적이다가 서랍에 넣어둔 것이 벌써 한 해를 더 훌쩍 넘겼네요. 마침 최근에 모교에 다녀오기도 했고, 재학 시절 자주 거닐던 산책로를 걷다가 이 글을 마저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인 업계는 남초현상이 뚜렷한 곳입니다.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업계 관계자 분들이 아직은 아무래도 남자분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제가 업무상 이메일을 쓸 때도, 성별이 딱히 드러나지 않는 표현을 쓰면 상대방은 으레 제가 남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더라고요. 신기한 점은 제 와인학교 동기들의 성비는 거의 반반이었는데, 입학 사정관들이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어요. 원래는 여자 동기가 두 명이 더 많았었는데, 과정 중 두 명이 자퇴를 해버리는 바람에 완전히 50대 50의 비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님들끼리도 이제 여학생이 더 많아지는 시대가 드디어 왔다라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씀하셨고, 후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도 성비는 비슷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입학하던 때쯤부터 성비의 균형이 맞기 시작했나 봐요.
와인학교 재학 시절, 졸업생들이 학교에 와서 사회에서의 이런저런 경험담을 나누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기획을 그렇게 하신 것이었는지 하필 행사일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었어요. 자연스레 외부에서 오신 분들 중 여자분들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중, 나이가 꽤 지긋한 분이 우리 강의실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훑어보시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하셨어요. "옛날 같으면 와인 따도 되는 사람은 이 중에 절반밖에 없네. 성차별 발언은 아니에요. 옛날에는 그랬다는 거지." 갑자기 무슨 말이지 싶어 저는 의아해할 뿐이었고, 제 근처에 앉은 여자 동기가 손을 들어 질문했습니다.
"옛날에는 왜 그랬던 걸까요?"
갑자기 들어와 파장을 일으킨 그분은 마치 질문이 있을 거라고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비단 와인만 그런 건 아니고 그때는 여자가 하면 안 되는 게 많은 시절이었죠. 여자가 양조장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법석을 떨던 때가 있었어요. 그랬다간 와인 맛이 변한다나 뭐라나. 와이너리에서 여자를 직원으로 아예 안 쓰던 시절도 있었죠. 그것뿐인가. 와인은 무조건 남자가 개봉해야 된다. 그랬었죠."
강의실 내 여기저기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침 테이스팅 수업이 예정된 시간이기에 교수님이 와인을 한 상자 안고 들어오셨습니다. 뭔가 이야기가 오가던 중인 것을 캐치한 교수님께 간략하게 주제를 설명드렸더니, 이번에는 교수님이 의견을 보태셨습니다.
"오늘 같은 날 굉장히 적합한 주제이기도 하네요. 그래서 제가 들은 이야기도 좀 전하자면, 와인병을 여자가 따면 안 된다는 거는 뭐라더라, 그 와인병을 뒤집어서 보면 여자의 자궁을 닮아서 그랬다나 봐요. 옛날에는 허벅지 사이에 와인병을 끼고 와인을 따는 일이 잦았는데, 여자가 그 자세를 취하면 선정적이라서 안 된다 라는 말도 있었어요. 심지어는 그 코르크 마개가 빠져나오는 "뾱" 소리도 풍기문란을 조장할 수 있다 그랬대요. 더 나아가서는 와인 자체를 여자로 보는 시선도 있었죠. 아직 개봉하지 않은 와인은 남자 경험이 없는 여자와 연관 지어 생각했거든요. 와인을 개봉하는 순간을 여자가 처녀성을 잃는 순간에다 비유하기도 했죠. 실제로 옛날 프랑스에서는 부부가 첫날밤을 보낸 후에 처녀혈이 묻은 침대 시트를 다음날 창문에 붙여두곤 했어요. 이를 통해서 신부는 처녀였으며, 와인으로 치면 이제 코르크가 개봉된 상태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의도였죠. 옛날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요즘 같으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이런 이유들 때문에 와인은 남자가 개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죠. 코르크 마개를 여는 것을 마치 여자의 처녀성을 가져가는 것에 빗대어,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동기 중 한 명이 질문했습니다.
"와인을 따면 안 된다는 건 그렇다 치고, 와이너리에서 여자를 직원으로 안 쓴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교수님 대신, 우리 강의실에 들어와 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분이 대답하셨습니다.
"와인을 마치 blood of the vine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몸 바깥에도 영향을 준다고 믿었어요. 여자의 생리 통증 중 하나가 두통인 것처럼, 와인을 마시고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연관 짓기도 했죠. 그래서 출혈을 동반한 생리현상을 겪는 여자가 와인을 만들게 되면 와인 오크통이나 와인병 안의 내용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여자의 손이 닿으면 와인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뿐 아니라, 여자가 자주 흘리는 깨끗하지 못한 피(처녀성을 잃을 때나, 생리를 할 때, 아이를 낳을 때 등)가 와인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여자가 와인을 개봉하는 것은 미식 면에서도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나 봐요. 더더욱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자는 피를 흘리는 존재이니까 사냥을 하거나 도축을 하면 안 된다 뭐 그런 시절도 있었죠."
우리끼리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흐름을 끊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이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자,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혹시 오늘 그 날인 사람 손들어 볼래요? 나와서 와인 따 봐요. 가능하면 레드로 골라서."
강의실의 절반을 채운 우리들이 까르르 웃었습니다. 마침 세 명 정도가 손을 들었고, 각자 오프너를 들고 와인을 개봉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일부러 와인 병을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오픈했죠. 제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여성의 날이었습니다.